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5] 네번째 사사 드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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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6
❖ 드보라,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꿀벌!
삼갈의 이야기를 하면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청동기는 일상 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이미 철기를 사용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가나안 지역을 호령하던 하솔의 왕 야빈은 철병거 구백 대를 보유한 군사 강국이었습니다. 또 신임이 두터웠던 시스라를 앞세워, 삼갈의 이후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혹한 정치로 괴롭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던 선지자가 드보라였습니다. 드보라의 남편은 랍비돗(לַפִּידוֹת)이었습니다. 랍비돗이라는 이름은 "횃불" 또는 "번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드보라(דְּבוֹרָה)라는 이름은 '꿀벌'이라는 뜻인데요. 하나님께서 번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아니라, 꿀벌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여자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의사결정의 최종 책임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바깥으로 보이는 조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분이신 것이 분명합니다. 과거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여자들이 일종의 재산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 사람의 수를 셀 때 조차도 여인들의 숫자를 세지 않았더랬습니다. 집에서 식사를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가정에서 벌어지는 여성들의 일들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하는 일들에 연장자인 여자의 생각이 반영될 지언정, 여자들은 남자들 아래에 종속되었던 사회가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는 고대 서아시아 지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런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솔의 왕으로부터 압제를 받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펼치던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는데, "번개" 또는 "횃불"이라는 멋진 이름의 남자가 아니라, "꿀벌"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라니요!
랍비돗 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납달리 게데스에 살고 있던 바락을 불러다가 납달리 사람과 스불론 사람들을 모아서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전쟁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드보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락이 선뜻 응하지 않습니다. 다볼산에 납달리 사람과 스불론 사람들 1만명을 모을 지언정,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시스라의 병거와 전쟁해서 이길 확률은 매우 적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런 무모한 전쟁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의심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와 함게 가면 내가 가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나도 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바락의 이 말에는 바락의 두려움과 믿음 없이 함께 녹아있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드보라가 바락과 함께 다볼산에 오릅니다. 전장터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것이지요. "번개"라는 이름을 가진 바락(בָּרָק)도 두려워하는 그 전쟁터에 "꿀벌" 한 마리가 전쟁을 이끄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꿀벌'이라는 이름의 선지자 드보라가 사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건조한 정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외적인 조건, 그리고 전통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보편적인 시선이 어떨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여성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 다볼산에 꾸려야할 진영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또는 가나안 사람과 전쟁을 할 때 불문율처럼 지켜지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산 위에 진영을 꾸미는 것입니다. 평지에는 안됩니다. 언제라도 병거의 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 병거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언제부터 이스라엘이 병거를 갖추며 전쟁을 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삼하 8:4에서 다윗이 하닷에셀과의 전쟁에서 병거를 탈취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솔로몬의 시대에 이미 천사백대의 병거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다윗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에서 병거가 주요 무기체계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추측만 할 뿐입니다. 병거는 당시의 탱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 명의 군사를 조직했어도 굳이 비유하자면, 소총수들일 뿐 입니다. 그런 소총수들 사이로 탱크가 지나간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무리 소총수들이 탱크를 향해 사격을 한들, 탱크가 멈추어 설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병거는 그 탱크보다 기동력이 더 좋습니다. 그러니 병거가 있고 없음은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아직 병거를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병거의 기동력을 감당해낼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병거가 쉽게 오를 수 없는 산 위에 진을 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래야하는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산이 다볼산입니다.
다볼산은 이스르엘 골짜기 한가운데 있는 산입니다. '골짜기'라고 부르지만, 갈릴리 산지와 사마리아 산지가 사이에 끼어 가나안 땅을 동서로 나누는 분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길이가 대략 65km가 되니, 정말 어머어마한 평야지대입니다. 이 골짜기의 한 가운데 있는 다볼산(해발 575m)은 주변의 다른 산들과는 달리 모양이 독특하고 높습니다. 멀리서 보는 것 보다, 훨씬 경사가 급해서 병거가 오르기는 불가능한 산이지요. 그러나, 그 정상은 평탄해서 많은 수의 군인들이 진영을 갖추고 전열을 정비하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였습니다.
❖ 왕국 시대와 전혀 다른 사사 시대
꼭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드보라의 이야기에서 은근히 말하고 싶은 그것이 있거든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먼저 드보라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드보라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여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서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와 벧엘 사이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면서, 드보라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할지,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삿 4:5). 그런데, 드보라가 여자이면서도 사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드보라가 선지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니, 이스라엘이 의사결정을 하거나 분쟁이 있을 때, 재판을 하는 권위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왕정 시대는 달랐습니다. 대하 19:8에 보면 여호사밧의 종교개혁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여호사밧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재판 조직을 말합니다. 여호사밧이 만든 재판 제도에 따르면,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족장들 중에서 사람을 세워서 재판을 주도하게 합니다. 왕정은 거대한 나라와 제국을 시스템으로 통치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시스템의 원칙을 갖추어 놓아야 사람들 사이에 불만이 없고, 왕의 입장에서도 시스템 안에서 예측 가능한 통치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판단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스템 안에서 예측 가능해야 원할한 통치와 왕의 명령이 세워질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면, 왕은 레위인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표자들과만 잘 관계를 맺으면 손쉽게 한 나라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왕은 이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왕은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풍요를 보장하고, 그들은 성전과 왕궁을 중심으로 왕과 결탁해서 그 왕의 통치에 정당성을 주는 거예요. 그러므로 제사장과 왕, 정치 지도자들과 왕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기원전 3세기 이후로는 레위인들 가운데에서도 서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 왕과 결탁해서 대제사장의 직위를 매관매직하는 어이없는 일들도 비일비재 했습니다.
이런 왕과 지배 계층에 속한 이들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입니다. 예언자라고도 하지요. 선지자들은 조직과 시스템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돌무화과 나무 농사를 짓는 사람도, 목동도, 심지어 가정 주부인 여자도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옳지 않은 것에 침묵하지 않아요. 왕과 왕의 주위에서 권력을 탐하는 제사장들과 지파의 정치 지도자들의 도덕과 신앙의 타락을 모른 척 지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면은요, 그 상대가 누군라도 "아니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이 선지자들입니다. 그래서 왕과 제사장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공공연한 적이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선지자라고 앞으로 나온 사람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수준이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아마 무시와 경멸도 서슴지 않았을 겁니다. 왕정 시대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던 때입니다.
그 시대에 살던 사람, 그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입니다. 이들이 과거의 역사를 꼼꼼히 다시 되돌아보니, 사사 시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주도하고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자격과 사사들이 이끌어 가는 다스림의 원칙이 너무나 다른 겁닌다. 역사를 통해 보건데, 재판관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딱 하나였습니다. "그에게 (그녀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는가?" 성별도, 출신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출신을 따지자면 삼갈은 안 되죠. 이름이 벌써 이방 사람 이름이 잖아요. 성별로 따지면, 드보라도 안될 사람이죠. 하지만 성경에서는요 출신과 성별을 따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냐 임하지 않았느냐이고, 그것이 오로지 사사가 되는 기준이었거든요.
사사기 역사가가 드보라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이제는 '바락'이라는 사람을 보겠습니다. 성경은 바락을 소개하면서, 바락이 아비노암의 아들이었고, 납달리 땅의 게데스에 살고 있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소개를 읽고서는 바락이 납달리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여호수아 19장 을 읽어보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지도에는 레위인들이 받은 도시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48개의 도시들의 명단입니다. 48개의 도시에 명단 중에 게데스가 있어요. 게데스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장소가 서로 경합하지만, 게데스는 레위인이 살던 도시이자 심지어는 도피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들에게 땅을 줄 때,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는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히 48개의 도시들을 나누어 주었어요. 그렇다면,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레위 지파 사람이라는 말이겠지요. 비록 그 도시가 있는 땅은 납달리 지파가 할당 받은 영역이지만, 그 도시는 레위 사람들의 도시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바락은 레위 지파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이제 다시 드보라로 돌아와서 드보라와 바락의 관계를 볼까요? 여성이자 선지자인 드보라가 남성이자 레위인이고 군대 장관인 바락에게 다볼 산으로 가서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싸우라고 합니다. 왕정의 시대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조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고 다들 인정하는 레위인들이 사회적으로는 한 남자의 아내인 드보라의 명령을 받는 형국입니다. 그러나 사사 시대에는 그것이 아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보라의 말에 바락이 오롯이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두려웠던 거지요. 그래서 드보라가 함께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겠노라고 한 발을 뺍니다. 결국, 선지자 드보라와 레위인 바락이 함께 하는 전쟁의 지도자가 남자이자 레위인인 바락이 아니라, 여자이자 선지자인 드보라가 된 셈입니다. 이게 놀라운 것이죠. 이 이야기를 글로 읽고 있는 왕국 시대 사람들, 또는 왕국 시대를 경험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몸으로 알고 있는 상식과 드보라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읽고 있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레위인, 제사장, 열두 지파의 지도자가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공동체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출애굽한 선조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던 시대로 가보니,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정당성이 그의 출신과 사회적인 지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이웃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서로 연합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의 요건은 오로지 그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왕국의 시대와 사사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 힘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략으로
잠시 발칙한 상상을 하나 해보려고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에도 일종의 낭만이 있었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장군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대열에서 앞으로 나와서는 서로 적장끼리서 통성명을 하고 상대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하잖아요. 성경에도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을 보면, 전장에서 서로 만나 싸우기 전에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럼 드보라의 이 전쟁에도 그런 낭만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냥 상상해 보는 겁니다. 저 멀리서 이스라엘의 전쟁 지도자라는 자가 오는데, 걸음걸이도 그리 우람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점점 가까이오면서 자세히 보니, 여자인 거지요. 철로된 갑옷으로 중무장한 시스라 앞에, 글쎄요. 가죽 갑옷이라도 입었을까 모르겠을 드보라가 섰습니다. 일단 이 상황이 시스라에게는 모욕적이었을 겁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적장이 자기를 만나러 왔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여자 하나를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깔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시스라가 드보라에게 말합니다. "나는 하솔 왕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다." "나는 태양의 아들('시스라'라는 이름의 뜻으로 추정)이다". 그 때 상대편의 여자가 대답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사사 드보라다." "나는 '꿀벌'이다." 전쟁의 지도자 쯤 되면, '번개'니, '천둥'이니, '태양의 아들'이니, 뭐 이런 거창한 이름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말벌이나 땡벌도 아니라, '꿀벌'이라니요! 그러니 시스라가 드보라를 얼마나 우습게 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태양의 아들' 도 아니고, '번개'도 아니라 '꿀벌'을 통해서 새 역사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다볼 산에 진을 치고 있는 드보라가 산 밑으로 이스라엘 군인들과 함께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안되는 거지요. 이스라엘은 산 위에서 버텨야하는 겁니다. 내려오면 죽는 거예요. 이스라엘 군대에는 병거가 없잖아요. 시스라는 애초에 이 전쟁을 시작할 때, 장기전이 될 수도 있겠다는 각오를 하고 나왔을 겁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산 위에서 금방 내려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가 다볼 산 아래로 내려오는 겁니다. 시스라가 보기에 전쟁 경험이 없는 것이 분명한 여자 지도자는 기본적인 전쟁의 전술과 전략도 모르는 어리석은 장군일 뿐입니다. 얕잡아 봤겠죠.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전쟁터에 여자 꿀벌이 나올 때부터 알아봤어. 전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그런데 드보라와 시스라의 전장인 이스르엘 골짜기는 한 가지 특징 있습니다. 건기와 우기 때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는 평야와 같은 곳이 이스르엘 골짜기입니다. 이 지역은 원래 물이 많아요. 성경에도 이 이스라엘 평야에 있는 기손 강이라는 강이 나오는데(삿 4:13), 평야와 같은 이스르엘 골짜기 구석구석을 마치 사람 몸의 실핏줄처럼 뿌려져 있는 강이 기손 강입니다. 비록 농수로 같은 강이지만, 그만큼 땅이 물이 풍부하고 비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기가 되면요, 이 땅 전체에서 물이 올라 와요. 땅이 머금고 있는 물이 워낙에 많다 보니까 우기에는 물이 올라오는 거에요. 물이 올라 와서 이스르엘 골짜기가 완전히 진흙창이 됩니다. 지금도 우기에 이스라엘 골짜기의 밭을 걸을라 치면, 운동화 밑에 쩍쩍 달라붙는 진흙 때문에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걷기를 포기할 정도예요. 드보라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스라는 몰랐구요.
시스라가 다볼 산에서 군대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 병거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이스라엘 군대가 다볼산 자락 앞에서 머리를 돌려 산 뒤로 돌아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시스라는 두려움에 떤 이스라엘 군대가 도망간다고 생각했을지 몰라요. 더 열심히 이스라엘 군대를 뒤쫓아가는데, 아무리 달려도 이스라엘 군대와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 거예요. 병거가 전부 진흙에 쳐박힌 거지요. 그야 말로 기손의 물결이 땅을 적시고 병거들을 꼭 붙들고 있는 듯 꿈쩍하지 않는 것입니다(삿 5:21). 땅이 병거가 달리기에 좋을 때나 시스라가 전쟁에서 유리한 거지, 이미 전차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면 병거에서 내려와 싸워야합니다. 이제는 창과 화살의 전쟁일 뿐입니다. 그리고 육탄전이 벌어지겠지요. 그런데 철 갑옷을 두르고 있는 시스라의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병거에서 내려 오면, 오히려 진흙에 더 깊게 발이 빠져서 움직이기가 더 힘들겁니다. 전쟁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병거에서 내린 시스라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도망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병거를 타고 도망하는 것이 빠를까요, 내려서 달리는 것이 빠를까요? 뛰어서 도망가는 것이 빠를까요, 걷는 것이 빠를까요? 당연히 달리는 것이, 병거를 타고 달리는 것이 훨씬 더 빠르겠지요. 그러나 시스라는 걸어서 도망하였습니다(삿 4:17). 진흙 때문에요. 오히려 입고 있었던 철갑옷이 진흙을 걷기에 거추장스러워서 다 내벗어던지고 가지는 않았을까요?
❖ 여인의 명령으로 시작한 전쟁, 그리고 여인의 손으로 끝난 전쟁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겐 사람들이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의 하나라고 소개합니다(삿 4:11). 겐 사람들은 지역적으로 하솔과 가깝기 때문에 하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또 겐족 자체가 원래는 유목을 하면서 시나이 반도 북쪽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인지라, 유목민들의 전통을 따라서 자기들이 만나는 사람이 우리의 적이든 아니면 친구든 모두에게 먼저 친절하게 맞이해 주고 대해주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시스라는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망 간 겁니다. 나름대로 시스라가 판단한 현명한 선택이었지요.
이곳으로 도망갔을 때, 잘 아시다시피, 야엘이 시스라에게 우유를 주고, 따뜻한 이불로 그를 덮어 주었습니다. 시스라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여태까지 전쟁하고 도망 가는 중인데, 그 장막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아마 시스라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하나처럼 함께 출애굽한 모세의 장인의 가족의 장막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 가장 좋은 피난처였기 때문에 마음을 놓았을 수 있었을 거구요. 또 이 긴 거리를 진흙창을 달렸으니, 체력이 거의 방전되었을 겁니다. 배도 부르고, 이제 몸도 따뜻하니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랬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에게로 가서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노리에 박아버렸습니다. 갈릴리 북부를 호령하고 이스라엘을 떨게 했던 그 위대한 장군이 여인의 손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드보라의 전쟁 이야기는 그냥 사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은 소수자들이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역사의 전면으로 드러나는 역사 이야기입니다.
❖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드보라를 선택하여 사사로 세우셨을까요? 왜 드보라와 바락을 불렀을까요?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를 보면,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출애굽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드보라는 출애굽의 역사를 알고 있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의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 책의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언자들의 가장 큰 역할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잊었던 역사, 이스라엘 사람들이 잊었던 율법을 다시 기억나게 해서, 그들의 현재와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과거(역사)를 통해 그들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궁극적으로 현재를 바꾸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미래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드보라는 역사를 알고 있는 여자였고, 선지자였습니다. 드보라는 출애굽의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의 이유가 과거 선조들이 출애굽 당시 새 신들을 선택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터 징계를 받던 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삿 5:8).
결국 하나님은 드보라를 통해서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뛰어난 문화와 기술에 눌려서 그들을 두려워했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지에 큰 길이 있었지만, 그 길로 다니지도 못하고, 산에 나 있는 오솔길로 다녔습니다. 조금 평지와 가까운 곳에 정착할라 치면 가나안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서는 마을을 쑥대빹으로 만들어 버려서 이제는 평지 가까이로 내려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삿 5:6-7). 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옳지 못한 일을 일삼던 이스라엘이 받은 응분의 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을 바꾸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을 알고 있던 여선지자 드보라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평지의 길을 마음 껏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고, 여선지자 드보라를 통해서 하셨습니다.
❖ 불행의 그림자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마냥 즐거운 승리의 노래가 아닙니다. 이 노래의 중간, 13절에서 18절 사이에는 함께 싸운 이스라엘 지파의 명단이 나오는데요. 에브라임 사람, 베냐민 사람, 므낫세 사람(? 마길), 스불론 사람, 잇사갈 사람, 르우벤 사람, 납달리 사람들이 내려와서 싸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명단의 끝에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했다"고 이야기하고, "단은 배에 머물렀다"고, 그리고 "아셀은 해변에 앉아 자기 부둣가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길르앗 지역에는 갓지파가 살고 있었으니, 길르앗은 갓지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단지파와 아셀지파는 해변의 땅을 받은 지파들인데요. 이 세 지파의 사람들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답니다. 더군다나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아예 이야기 조차 하지 않아요. 말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일까요?
사사의 시대는 끝나지 않은 정복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다만 공동체의 지도력이 여호수아에서 사사로 이전이 된 시대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경계를 나누어 주시고 각 지파에게 주신 것은 땅만이 아니라, 그 땅을 정복해야하는 소명도 함께 주신 거예요. 그 소명은 지파 혼자 감당할 수있는 몫이 아닙니다. 열두 지파가 연합하여 함께 이루어 나아가야할 것이었습니다. 서로를 도우며 싸워가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모세에게 땅을 받으며, 가나안 땅의 정복이 끝날 때까지 분배 받은 땅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을 했습니다(민 32:20-42). 출애굽한 이스라엘 중의 하나라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그 약속을 실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약속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사 드보라가 소집한 전쟁에 함께하지 않은 지파들이 있는거예요. 여호수아라는 지도자가 죽고 난 후, 사사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파들 사이의 연대 의식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그 재앙의 시작을 울리는 서곡과 같은 노래입니다. 광야의 시대와는 달리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난 다음부터 문화, 경제적인 수준은 광야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으로 연결된 지파의 정체성들이 정착해서 누리는 안정적인 삶을 누리면서 느슨해 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것이 나중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마저도 느슨해 지는 이유가 되었고, '지파의 연합'이 아니라, 결국은 지파들 사이에 내전까지 벌어지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드보라의 노래는 그 징조를 슬쩍 내비쳐주는 겁니다. "아, 아무개는 오지 않았구나! 누구 누구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며 시스라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왔는데, 아무개는 주판알을 튕겨보고 오지 않았구나!"
결국 드보라도 아니고, 바락은 더더욱 아니고, 전쟁에 참전한 지파 중의 어느 장수도 아니고, 출애굽할 때 함께 나온 겐족의 여인의 손에 시스라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전쟁 무기가 아니라, 여인의 천막을 붙들고 있는 말뚝에 시스라가 죽었다는 노래를 통해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런 것을 덧붙여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전쟁은 드보라와 바락이 이끈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 전쟁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열두 지파가 여호와 하나님의 땅에서 연합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생각하기에 하찮게 보이고, 그 존재감 조차 없어 보이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실 것이다. 그 때,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고 선택하신 그 만이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그가 비록 이스라엘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닐지라도!
삼갈의 이야기를 하면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청동기는 일상 생활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이미 철기를 사용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가나안 지역을 호령하던 하솔의 왕 야빈은 철병거 구백 대를 보유한 군사 강국이었습니다. 또 신임이 두터웠던 시스라를 앞세워, 삼갈의 이후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혹한 정치로 괴롭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던 선지자가 드보라였습니다. 드보라의 남편은 랍비돗(לַפִּידוֹת)이었습니다. 랍비돗이라는 이름은 "횃불" 또는 "번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드보라(דְּבוֹרָה)라는 이름은 '꿀벌'이라는 뜻인데요. 하나님께서 번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아니라, 꿀벌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여자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의사결정의 최종 책임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바깥으로 보이는 조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분이신 것이 분명합니다. 과거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여자들이 일종의 재산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 사람의 수를 셀 때 조차도 여인들의 숫자를 세지 않았더랬습니다. 집에서 식사를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가정에서 벌어지는 여성들의 일들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하는 일들에 연장자인 여자의 생각이 반영될 지언정, 여자들은 남자들 아래에 종속되었던 사회가 지중해를 마주보고 있는 고대 서아시아 지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런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솔의 왕으로부터 압제를 받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펼치던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는데, "번개" 또는 "횃불"이라는 멋진 이름의 남자가 아니라, "꿀벌"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라니요!
랍비돗 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납달리 게데스에 살고 있던 바락을 불러다가 납달리 사람과 스불론 사람들을 모아서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전쟁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드보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락이 선뜻 응하지 않습니다. 다볼산에 납달리 사람과 스불론 사람들 1만명을 모을 지언정,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시스라의 병거와 전쟁해서 이길 확률은 매우 적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런 무모한 전쟁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의심했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와 함게 가면 내가 가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나도 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바락의 이 말에는 바락의 두려움과 믿음 없이 함께 녹아있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드보라가 바락과 함께 다볼산에 오릅니다. 전장터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것이지요. "번개"라는 이름을 가진 바락(בָּרָק)도 두려워하는 그 전쟁터에 "꿀벌" 한 마리가 전쟁을 이끄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꿀벌'이라는 이름의 선지자 드보라가 사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건조한 정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외적인 조건, 그리고 전통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보편적인 시선이 어떨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여성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 다볼산에 꾸려야할 진영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또는 가나안 사람과 전쟁을 할 때 불문율처럼 지켜지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산 위에 진영을 꾸미는 것입니다. 평지에는 안됩니다. 언제라도 병거의 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 병거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언제부터 이스라엘이 병거를 갖추며 전쟁을 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삼하 8:4에서 다윗이 하닷에셀과의 전쟁에서 병거를 탈취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솔로몬의 시대에 이미 천사백대의 병거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다윗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에서 병거가 주요 무기체계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추측만 할 뿐입니다. 병거는 당시의 탱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 명의 군사를 조직했어도 굳이 비유하자면, 소총수들일 뿐 입니다. 그런 소총수들 사이로 탱크가 지나간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무리 소총수들이 탱크를 향해 사격을 한들, 탱크가 멈추어 설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병거는 그 탱크보다 기동력이 더 좋습니다. 그러니 병거가 있고 없음은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아직 병거를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병거의 기동력을 감당해낼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병거가 쉽게 오를 수 없는 산 위에 진을 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래야하는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산이 다볼산입니다.
다볼산은 이스르엘 골짜기 한가운데 있는 산입니다. '골짜기'라고 부르지만, 갈릴리 산지와 사마리아 산지가 사이에 끼어 가나안 땅을 동서로 나누는 분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길이가 대략 65km가 되니, 정말 어머어마한 평야지대입니다. 이 골짜기의 한 가운데 있는 다볼산(해발 575m)은 주변의 다른 산들과는 달리 모양이 독특하고 높습니다. 멀리서 보는 것 보다, 훨씬 경사가 급해서 병거가 오르기는 불가능한 산이지요. 그러나, 그 정상은 평탄해서 많은 수의 군인들이 진영을 갖추고 전열을 정비하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였습니다.
❖ 왕국 시대와 전혀 다른 사사 시대
꼭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드보라의 이야기에서 은근히 말하고 싶은 그것이 있거든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먼저 드보라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드보라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여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서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와 벧엘 사이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면서, 드보라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할지,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삿 4:5). 그런데, 드보라가 여자이면서도 사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드보라가 선지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니, 이스라엘이 의사결정을 하거나 분쟁이 있을 때, 재판을 하는 권위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왕정 시대는 달랐습니다. 대하 19:8에 보면 여호사밧의 종교개혁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여호사밧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재판 조직을 말합니다. 여호사밧이 만든 재판 제도에 따르면,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족장들 중에서 사람을 세워서 재판을 주도하게 합니다. 왕정은 거대한 나라와 제국을 시스템으로 통치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시스템의 원칙을 갖추어 놓아야 사람들 사이에 불만이 없고, 왕의 입장에서도 시스템 안에서 예측 가능한 통치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판단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스템 안에서 예측 가능해야 원할한 통치와 왕의 명령이 세워질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면, 왕은 레위인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표자들과만 잘 관계를 맺으면 손쉽게 한 나라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왕은 이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왕은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풍요를 보장하고, 그들은 성전과 왕궁을 중심으로 왕과 결탁해서 그 왕의 통치에 정당성을 주는 거예요. 그러므로 제사장과 왕, 정치 지도자들과 왕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기원전 3세기 이후로는 레위인들 가운데에서도 서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 왕과 결탁해서 대제사장의 직위를 매관매직하는 어이없는 일들도 비일비재 했습니다.
이런 왕과 지배 계층에 속한 이들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입니다. 예언자라고도 하지요. 선지자들은 조직과 시스템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돌무화과 나무 농사를 짓는 사람도, 목동도, 심지어 가정 주부인 여자도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옳지 않은 것에 침묵하지 않아요. 왕과 왕의 주위에서 권력을 탐하는 제사장들과 지파의 정치 지도자들의 도덕과 신앙의 타락을 모른 척 지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면은요, 그 상대가 누군라도 "아니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들이 선지자들입니다. 그래서 왕과 제사장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공공연한 적이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선지자라고 앞으로 나온 사람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수준이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아마 무시와 경멸도 서슴지 않았을 겁니다. 왕정 시대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던 때입니다.
그 시대에 살던 사람, 그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입니다. 이들이 과거의 역사를 꼼꼼히 다시 되돌아보니, 사사 시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주도하고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자격과 사사들이 이끌어 가는 다스림의 원칙이 너무나 다른 겁닌다. 역사를 통해 보건데, 재판관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딱 하나였습니다. "그에게 (그녀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는가?" 성별도, 출신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출신을 따지자면 삼갈은 안 되죠. 이름이 벌써 이방 사람 이름이 잖아요. 성별로 따지면, 드보라도 안될 사람이죠. 하지만 성경에서는요 출신과 성별을 따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냐 임하지 않았느냐이고, 그것이 오로지 사사가 되는 기준이었거든요.
사사기 역사가가 드보라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해서 이제는 '바락'이라는 사람을 보겠습니다. 성경은 바락을 소개하면서, 바락이 아비노암의 아들이었고, 납달리 땅의 게데스에 살고 있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소개를 읽고서는 바락이 납달리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여호수아 19장 을 읽어보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지도에는 레위인들이 받은 도시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48개의 도시들의 명단입니다. 48개의 도시에 명단 중에 게데스가 있어요. 게데스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장소가 서로 경합하지만, 게데스는 레위인이 살던 도시이자 심지어는 도피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들에게 땅을 줄 때,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는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별히 48개의 도시들을 나누어 주었어요. 그렇다면,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레위 지파 사람이라는 말이겠지요. 비록 그 도시가 있는 땅은 납달리 지파가 할당 받은 영역이지만, 그 도시는 레위 사람들의 도시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바락은 레위 지파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이제 다시 드보라로 돌아와서 드보라와 바락의 관계를 볼까요? 여성이자 선지자인 드보라가 남성이자 레위인이고 군대 장관인 바락에게 다볼 산으로 가서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싸우라고 합니다. 왕정의 시대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조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고 다들 인정하는 레위인들이 사회적으로는 한 남자의 아내인 드보라의 명령을 받는 형국입니다. 그러나 사사 시대에는 그것이 아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보라의 말에 바락이 오롯이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두려웠던 거지요. 그래서 드보라가 함께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겠노라고 한 발을 뺍니다. 결국, 선지자 드보라와 레위인 바락이 함께 하는 전쟁의 지도자가 남자이자 레위인인 바락이 아니라, 여자이자 선지자인 드보라가 된 셈입니다. 이게 놀라운 것이죠. 이 이야기를 글로 읽고 있는 왕국 시대 사람들, 또는 왕국 시대를 경험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몸으로 알고 있는 상식과 드보라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읽고 있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레위인, 제사장, 열두 지파의 지도자가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공동체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출애굽한 선조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던 시대로 가보니,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정당성이 그의 출신과 사회적인 지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이웃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서로 연합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의 요건은 오로지 그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왕국의 시대와 사사 시대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 힘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략으로
잠시 발칙한 상상을 하나 해보려고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에도 일종의 낭만이 있었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장군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대열에서 앞으로 나와서는 서로 적장끼리서 통성명을 하고 상대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하잖아요. 성경에도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을 보면, 전장에서 서로 만나 싸우기 전에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럼 드보라의 이 전쟁에도 그런 낭만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냥 상상해 보는 겁니다. 저 멀리서 이스라엘의 전쟁 지도자라는 자가 오는데, 걸음걸이도 그리 우람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점점 가까이오면서 자세히 보니, 여자인 거지요. 철로된 갑옷으로 중무장한 시스라 앞에, 글쎄요. 가죽 갑옷이라도 입었을까 모르겠을 드보라가 섰습니다. 일단 이 상황이 시스라에게는 모욕적이었을 겁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적장이 자기를 만나러 왔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여자 하나를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깔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시스라가 드보라에게 말합니다. "나는 하솔 왕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다." "나는 태양의 아들('시스라'라는 이름의 뜻으로 추정)이다". 그 때 상대편의 여자가 대답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사사 드보라다." "나는 '꿀벌'이다." 전쟁의 지도자 쯤 되면, '번개'니, '천둥'이니, '태양의 아들'이니, 뭐 이런 거창한 이름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말벌이나 땡벌도 아니라, '꿀벌'이라니요! 그러니 시스라가 드보라를 얼마나 우습게 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태양의 아들' 도 아니고, '번개'도 아니라 '꿀벌'을 통해서 새 역사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다볼 산에 진을 치고 있는 드보라가 산 밑으로 이스라엘 군인들과 함께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안되는 거지요. 이스라엘은 산 위에서 버텨야하는 겁니다. 내려오면 죽는 거예요. 이스라엘 군대에는 병거가 없잖아요. 시스라는 애초에 이 전쟁을 시작할 때, 장기전이 될 수도 있겠다는 각오를 하고 나왔을 겁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산 위에서 금방 내려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가 다볼 산 아래로 내려오는 겁니다. 시스라가 보기에 전쟁 경험이 없는 것이 분명한 여자 지도자는 기본적인 전쟁의 전술과 전략도 모르는 어리석은 장군일 뿐입니다. 얕잡아 봤겠죠.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전쟁터에 여자 꿀벌이 나올 때부터 알아봤어. 전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그런데 드보라와 시스라의 전장인 이스르엘 골짜기는 한 가지 특징 있습니다. 건기와 우기 때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는 평야와 같은 곳이 이스르엘 골짜기입니다. 이 지역은 원래 물이 많아요. 성경에도 이 이스라엘 평야에 있는 기손 강이라는 강이 나오는데(삿 4:13), 평야와 같은 이스르엘 골짜기 구석구석을 마치 사람 몸의 실핏줄처럼 뿌려져 있는 강이 기손 강입니다. 비록 농수로 같은 강이지만, 그만큼 땅이 물이 풍부하고 비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기가 되면요, 이 땅 전체에서 물이 올라 와요. 땅이 머금고 있는 물이 워낙에 많다 보니까 우기에는 물이 올라오는 거에요. 물이 올라 와서 이스르엘 골짜기가 완전히 진흙창이 됩니다. 지금도 우기에 이스라엘 골짜기의 밭을 걸을라 치면, 운동화 밑에 쩍쩍 달라붙는 진흙 때문에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걷기를 포기할 정도예요. 드보라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스라는 몰랐구요.
시스라가 다볼 산에서 군대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 병거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이스라엘 군대가 다볼산 자락 앞에서 머리를 돌려 산 뒤로 돌아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시스라는 두려움에 떤 이스라엘 군대가 도망간다고 생각했을지 몰라요. 더 열심히 이스라엘 군대를 뒤쫓아가는데, 아무리 달려도 이스라엘 군대와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 거예요. 병거가 전부 진흙에 쳐박힌 거지요. 그야 말로 기손의 물결이 땅을 적시고 병거들을 꼭 붙들고 있는 듯 꿈쩍하지 않는 것입니다(삿 5:21). 땅이 병거가 달리기에 좋을 때나 시스라가 전쟁에서 유리한 거지, 이미 전차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면 병거에서 내려와 싸워야합니다. 이제는 창과 화살의 전쟁일 뿐입니다. 그리고 육탄전이 벌어지겠지요. 그런데 철 갑옷을 두르고 있는 시스라의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병거에서 내려 오면, 오히려 진흙에 더 깊게 발이 빠져서 움직이기가 더 힘들겁니다. 전쟁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병거에서 내린 시스라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도망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병거를 타고 도망하는 것이 빠를까요, 내려서 달리는 것이 빠를까요? 뛰어서 도망가는 것이 빠를까요, 걷는 것이 빠를까요? 당연히 달리는 것이, 병거를 타고 달리는 것이 훨씬 더 빠르겠지요. 그러나 시스라는 걸어서 도망하였습니다(삿 4:17). 진흙 때문에요. 오히려 입고 있었던 철갑옷이 진흙을 걷기에 거추장스러워서 다 내벗어던지고 가지는 않았을까요?
❖ 여인의 명령으로 시작한 전쟁, 그리고 여인의 손으로 끝난 전쟁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겐 사람들이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의 하나라고 소개합니다(삿 4:11). 겐 사람들은 지역적으로 하솔과 가깝기 때문에 하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또 겐족 자체가 원래는 유목을 하면서 시나이 반도 북쪽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인지라, 유목민들의 전통을 따라서 자기들이 만나는 사람이 우리의 적이든 아니면 친구든 모두에게 먼저 친절하게 맞이해 주고 대해주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시스라는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망 간 겁니다. 나름대로 시스라가 판단한 현명한 선택이었지요.
이곳으로 도망갔을 때, 잘 아시다시피, 야엘이 시스라에게 우유를 주고, 따뜻한 이불로 그를 덮어 주었습니다. 시스라는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여태까지 전쟁하고 도망 가는 중인데, 그 장막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아마 시스라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하나처럼 함께 출애굽한 모세의 장인의 가족의 장막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 가장 좋은 피난처였기 때문에 마음을 놓았을 수 있었을 거구요. 또 이 긴 거리를 진흙창을 달렸으니, 체력이 거의 방전되었을 겁니다. 배도 부르고, 이제 몸도 따뜻하니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랬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에게로 가서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노리에 박아버렸습니다. 갈릴리 북부를 호령하고 이스라엘을 떨게 했던 그 위대한 장군이 여인의 손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드보라의 전쟁 이야기는 그냥 사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은 소수자들이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역사의 전면으로 드러나는 역사 이야기입니다.
❖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드보라를 선택하여 사사로 세우셨을까요? 왜 드보라와 바락을 불렀을까요?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를 보면,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삿 5:4-5)
출애굽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드보라는 출애굽의 역사를 알고 있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의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 책의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언자들의 가장 큰 역할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잊었던 역사, 이스라엘 사람들이 잊었던 율법을 다시 기억나게 해서, 그들의 현재와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과거(역사)를 통해 그들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궁극적으로 현재를 바꾸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미래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드보라는 역사를 알고 있는 여자였고, 선지자였습니다. 드보라는 출애굽의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의 이유가 과거 선조들이 출애굽 당시 새 신들을 선택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터 징계를 받던 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삿 5:8).
결국 하나님은 드보라를 통해서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뛰어난 문화와 기술에 눌려서 그들을 두려워했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지에 큰 길이 있었지만, 그 길로 다니지도 못하고, 산에 나 있는 오솔길로 다녔습니다. 조금 평지와 가까운 곳에 정착할라 치면 가나안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서는 마을을 쑥대빹으로 만들어 버려서 이제는 평지 가까이로 내려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삿 5:6-7). 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옳지 못한 일을 일삼던 이스라엘이 받은 응분의 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것을 바꾸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을 알고 있던 여선지자 드보라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평지의 길을 마음 껏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고, 여선지자 드보라를 통해서 하셨습니다.
❖ 불행의 그림자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마냥 즐거운 승리의 노래가 아닙니다. 이 노래의 중간, 13절에서 18절 사이에는 함께 싸운 이스라엘 지파의 명단이 나오는데요. 에브라임 사람, 베냐민 사람, 므낫세 사람(? 마길), 스불론 사람, 잇사갈 사람, 르우벤 사람, 납달리 사람들이 내려와서 싸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명단의 끝에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했다"고 이야기하고, "단은 배에 머물렀다"고, 그리고 "아셀은 해변에 앉아 자기 부둣가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길르앗 지역에는 갓지파가 살고 있었으니, 길르앗은 갓지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단지파와 아셀지파는 해변의 땅을 받은 지파들인데요. 이 세 지파의 사람들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답니다. 더군다나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아예 이야기 조차 하지 않아요. 말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일까요?
사사의 시대는 끝나지 않은 정복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다만 공동체의 지도력이 여호수아에서 사사로 이전이 된 시대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경계를 나누어 주시고 각 지파에게 주신 것은 땅만이 아니라, 그 땅을 정복해야하는 소명도 함께 주신 거예요. 그 소명은 지파 혼자 감당할 수있는 몫이 아닙니다. 열두 지파가 연합하여 함께 이루어 나아가야할 것이었습니다. 서로를 도우며 싸워가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모세에게 땅을 받으며, 가나안 땅의 정복이 끝날 때까지 분배 받은 땅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을 했습니다(민 32:20-42). 출애굽한 이스라엘 중의 하나라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그 약속을 실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약속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사 드보라가 소집한 전쟁에 함께하지 않은 지파들이 있는거예요. 여호수아라는 지도자가 죽고 난 후, 사사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파들 사이의 연대 의식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그 재앙의 시작을 울리는 서곡과 같은 노래입니다. 광야의 시대와는 달리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난 다음부터 문화, 경제적인 수준은 광야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으로 연결된 지파의 정체성들이 정착해서 누리는 안정적인 삶을 누리면서 느슨해 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것이 나중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마저도 느슨해 지는 이유가 되었고, '지파의 연합'이 아니라, 결국은 지파들 사이에 내전까지 벌어지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드보라의 노래는 그 징조를 슬쩍 내비쳐주는 겁니다. "아, 아무개는 오지 않았구나! 누구 누구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며 시스라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왔는데, 아무개는 주판알을 튕겨보고 오지 않았구나!"
결국 드보라도 아니고, 바락은 더더욱 아니고, 전쟁에 참전한 지파 중의 어느 장수도 아니고, 출애굽할 때 함께 나온 겐족의 여인의 손에 시스라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전쟁 무기가 아니라, 여인의 천막을 붙들고 있는 말뚝에 시스라가 죽었다는 노래를 통해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런 것을 덧붙여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전쟁은 드보라와 바락이 이끈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 전쟁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열두 지파가 여호와 하나님의 땅에서 연합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생각하기에 하찮게 보이고, 그 존재감 조차 없어 보이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실 것이다. 그 때,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고 선택하신 그 만이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그가 비록 이스라엘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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