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משא יהוה


 

신학대학교를 다닐 때, 나는 비교적 하고싶은대로 다 하고 사는 자칭 "21세기의 히피"였다. 내가 나중에 목회자가 되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지금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마음껏 내 인생을 즐기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내 태생이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되는 선 앞에서는 한번 움찔하기도 했다. 그리고 살짝 그 선 넘어로 발을 밀어 보기도 하고, 그 선 앞에서 뒤돌아 서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목회자가 되었다.

그런데 목회자가 되고 나서도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짐이 될 때가 있다. 사실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그리고 내가 당장에 손에 잡을 수 있을 것같은 일들 앞에서 나는 늘 흔들린다. 남들처럼 놀고 싶고, 남들처럼 먹고 싶고, 남들처럼 슬쩍 눈감고 내 신앙의 울타리로부터 잠시 마실갔다오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아닌데에도 성도들 앞에서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적도 있다. 작은 산골 교회에서 몇 되지 않은 교인들 가운데 한 명이 떠나가는 것이 무서웠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떠나가시는 것을 무서워할 겨를도 없이 내 몸과 마음은 이미 그 한 사람에게 묶여 있었다.

난 아직도 연약한 사람이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성경의 말씀으로 나를 다그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마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조회 때마다 훈시하는 듯한 하나님의 그 말씀은 그야말로 "짐"이다.

"하나님, 지금 제가 처한 현실을 보시라고요!" 

 
"이 백성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너에게 와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느냐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여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 말하였다고 하여라.

또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백성이 있으면, 내가 그 사람과 그 집안에 벌을 내리겠다고 하여라.

친구나 친척끼리 서로 말할 때에는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셨느냐?'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고 물어야 한다고 일러주어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너희가 다시는 써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그런 말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그에게 정말 부담이 될 것이라고 하여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만군의 주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여라.

이제 예언자에게 물을 때에는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셨느냐?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고 물어라.

내가 사람을 보내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 명령을 어기고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써서 말한다면,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내가 그들을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 하더라고 전하여라.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조상에게 준 이 도성도 함께 뽑아서, 멀리 던져 버리겠다 하더라고 전하여라.

내가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이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수치와 영원한 치욕들을 당하게 하겠다 말했다고 전하여라." (렘 23:33-40)

 

시드기야왕 때에 유다의 왕과 제사장, 고위 관료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눈엣가시였다. 너무나 힘든 시기를 보내야하는 그들에게 복과 은혜, 그리고 위로의 메세지가 필요한 그 때에, 이 예레미야라는 퇴물은 늘 "죄"와 "회개"를 외쳐댄다. "오늘이 여러분의 최고의 날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오늘보다 더 아름다운 내일이 있습니다"를 원하는 유다의 백성들에게 "너희들의 탐욕과 죄가 이 나라를 멸망하게 하리라"는 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쳐댄다.

백성들은 시큰둥했다. 힘 좀 쓴다는 사람들도 시큰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의 쫓겨난 제사장 집안에서 제사장이라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합법적이고 귄위가 있는 제사장 바스훌과 스바냐가 있지 않은가! 바스훌과 스바냐, 그리고 또 다른 선지자라고 불리는 하나냐는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평화의 메세지, 외적으로부터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메세지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포장지에 싸고 이쁘게 리본을 달아 전해 주었다. 이미 백성들에게 예레미야가 전하는 참 하나님의 말씀은 '짐'이었고, '부담'이었고,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퇴물 제사장 집안 출신 예언자의 헛소리에 불과하였다. 예레미야가 시장과 거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오!"라고 소리치며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할 때마다 그들은 "그래 또 무슨 짐스럽고 부담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משא יהוה을 가져왔니?"라고 비꼬며 조롱했다. 그리고 그 시장판의 인파 속에 나도 서 있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짐과 부담으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오히려 나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짐"으로 "부담"으로 생각하신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이던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아멘"하지 못했던 내 삶의 미래를 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에서 만난다.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편한 대로 끼워 맞추어 짐을 덜어내고 부담을 없애려고 하였던 내 삶의 미래를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에서 찾아본다.

 

무너진 히스기야 시대의 성벽 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