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서신]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성서 두루마리들 (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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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2
* 이 글은 기독교세계에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기고할 당시의 글의 타이틀은 "이스라엘 서신"이었습니다. 저의 형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글인데요. 그래서 중간 중간 "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런 배경에 대해서 이해하시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득 예전에 교회에서 새해를 맞이하여서 성도들이 직접 손으로 쓰는 '필사(筆寫) 성서'를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성서를 옮겨 써가면서 마음과 신앙을 가다듬고자 하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만큼 신앙적으로 한 사람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데 좋은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형. 한 가지 형에게 고백할 것이 있어요. 저도 한 부분을 맡아서 손으로 써야 했는데, 사실 제가 쓰지 않고, 학교 기숙사 후배에게 시켰습니다. 결국 저는 손도 대지 않았던 거지요. 그런데 변명이라면 변명이랄까.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의 다른 친구들도 손으로 옮겨 쓰는 것을 내야 하는 주일 하루 전에 벼락치기를 하든가, 아니면 다른 청년들이랑 또 다시 나누어서 부분부분 써 내려갔습니다. 이거, 하루아침에 고자질쟁이가 되어 버렸네요.
신학을 했거나, 교회에서 성서 공부를 조금 깊게 해 보았다면 한 번쯤 들었을 법한 말이 '쿰란'과 '사해사본'입니다. 사해 옆에 있는 쿰란에서의 성서 두루마리들의 발견으로 인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가장 오래된 성서 사본보다 무려 1,000년 이전의 사본 두루마리들과 그 내용을 알게 되었으니, 정말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본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 발견을 두고 정말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본의 발견이 1947년이었는데, 약 60년 사이에 진위(眞僞)를 알 수 없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성지순례에 오시는 분들이 사해사본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를 성지순례 안내자로부터 듣는 것은 그 수많은 에피소드 중의 하나일 뿐이지요. 그런데 에피소드는 에피소드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서는 몇 천 년의 세월을 거쳐 오면서도 성서를 지켜나간 신앙의 선배들 덕분에 그 글자 한자 한자가 너무나도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000년의 차이를 두고 있는 성서 사본 간에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내용의 일치입니다.
1,000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필체라든가, 표기법의 차이와 같은 학문적인 후벼파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 외에 그런 것이 오늘 성서를 읽는 형과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진짜 제가 형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사본의 발견과 함께 알려진 쿰란 사람들의 성서 필사 이야기입니다.
1947년 어느 날, 한 베두인('사막의 사람들'이라는 아랍어입니다.) 목동이 사해 북서쪽 언저리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과 염소도 생명이 있는 녀석들인데, 그 땡볕에서 하루 온종일 풀을 뜯거나 풀을 뜯으러 돌아다니는 일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사해 주변은 일 년에 비가 오는 날도 많지 않고 (하루 이틀정도나 제대로 내리는지 모르겠네요), 연평균 강수량도 20mm 안팎 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름이 되면 말이지요, 사해 주변지역의 온도가 섭씨 40도를 넘나들어요. 저도 여름 방학이 되어서 성지순례 안내를 하게 되면, 이 쿰란에서만 2리터정도의 물을 1시간 안에 뚝딱 해치우는데, 그 녀석들이라고 견디어낼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양들은 그늘이 있는 곳을 찾아들어가게 됩니다.
유대광야는 석회질의 토양인지라, 비가 오거나 물이 지나간 자리, 그리고 세월의 풍화에 이겨내지 못한 지반이 약한 곳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자연 동굴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유대광야 한 복판에서 양들이 찾아내는 그늘이라는 것은 바위 아래이거나,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동굴일 수밖에 없지요. 그 날도 베두인 목동이 양을 치던 중에 양이 한두 마리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녀석들이 갈 데라고는 그늘을 만들어 주는 커다란 바위 아래나, 동굴밖에 없지요. 그래서 목동이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동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동굴 안에 양들이 분명히 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한 목동은 그 동굴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찾아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목동도 귀찮았겠지요. 그 더운 땡볕 아래에서 언덕을 올라 동굴을 뒤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히 모르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그 동굴을 향해서 돌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돌에 맞아서, 아니면 깜짝 놀라 울어야 할 양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쨍그랑' 무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린 거예요. 베두인 목동은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겠지요? 그래서 그 동굴로 들어가 보았는데, 그 안에는 방금 돌을 던져서 깨어진 항아리와 깨어지지 않은 항아리들, 그리고 항아리들 안에 오래되어서 엉겨 붙어버린 가죽 뭉치들이 있는 겁니다. 이 가죽뭉치가 바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성서사본인 사해 사본입니다. 여기까지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히브리대학교에서 사본을 손에 넣기까지에는 근거 없는, 재미있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쿰란에서는 성서의 사본과 함께 당시 쿰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공동체의 규칙을 기록한 글들과 그 때 그 사람들의 생활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많은 다른 글들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쿰란 사람들의 생활을 짧게 말하자면, 저는 "성서처럼, 성서와 함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쿰란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종파를 무론하고 각지에서 쿰란의 공동체 생활을 동경하는 이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쿰란의 사람들은 그 직업들도 다양했습니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들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전에는 글을 돌조각이나, 나무, 그리고 토기에다가 기록하였는데, 이렇게 기록하는 방법의 단점은 긴 글을 기록할 수 없다는 겁니다. 광개토대왕비가 아무리 크기로서니, 이사야서 1장부터 66장까지를 다 기록하기에 넉넉하겠습니까? 그러면서 발전하게 된 것이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쿰란의 두루마리들의 대부분도 양피지들입니다. 양피지에 기록하게 되면서 예전에 비해서 그 기록의 방법이나 분량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고, 더 수월하게 문서를 남길 수 있게 되었지요.
예전에 비해서 성서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이 쉬워졌다고 해서 마음대로 성서를 기록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성서를 기록하는 방식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전통에 의하면, 성서를 기록하는 사람은 최소 2명에서 일반적으로는 3명이 함께 성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원본 성서 두루마리를 읽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읽어주는 두루마리를 쓰는 사람, 마지막 한 사람은 읽어주는 두루마리를 쓰는 사람이 제대로 쓰고 있는지를 옆에서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혹, 잘못 기록하면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지적할 테니, 잘못 필사할래야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럼 쓰다가 잘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새 양피지에 다시 처음부터!!! 그러니 거의 다 양피지를 채워가다가 잘못 쓰면, 정말 난감하겠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은 성서를 필사하다가 '하나님'이라는 말(엘로힘, 야웨 등등)이 나오면, 쓰던 두루마리를 멈추고서는 "정결례"라고 하여서 필사하는 곳 옆에 있는 정결욕조에 있는 물에 몸을 완전히 담갔다가 나오는 예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결국 창세기로부터 시작한다면, 매 절마다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기 전에 매번 정결례를 해야 했다는 말이지요. 베두인에 의해서 발견된 첫 번째 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 두루마리의 예를 들자면, 전체 이사야서를 필사하기 위해서 이 필사자들은 많게는 544번까지 정결목욕을 해야 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어떻게 보면 참 무식하고도 고지식한 필사의 전통인 듯하지만, 이렇게 철저한 성경의 필사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손에 쥐어진 성서가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변함없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의 성서는 그 가치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듯합니다. 현재까지도(정말 '현재까지도'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성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 한번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영예였고, 여자들은 아예 그 두루마리를 죽는 날까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새신자들이 그렇게 많이 사서 그렇겠습니까? 하도 읽어서 낡고 헤어져서 새로 사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겠습니까? 더러는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새롭게 예쁘게 인쇄된 성서와 각양각색의 새로운 가죽 표지 색과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새로 사는 사람들, 뭐 이런 사람들까지 다 쳐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성서가 최고의 베스트셀러고 스테디셀러라면,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도 비례적으로 많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성서가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단한 가치가 있어서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그 가치의 소중함을 몰라서, 분실하고 마구 홀대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전 교회에서 필사성서 만든다고 제게 떨어진(?) 분량을 채우려고 급급했던 제 손과 신앙이 이처럼 부끄러울 때가 없습니다.
유대광야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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