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몬산에서 터져나온 샘들이 훌라 계곡에서 모여서 이루어진 요단강은 남북으로의 길이만으로도 약 250km나 되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요단강"하면 생각나는 몇몇 이야기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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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 요단강은 주로 그 강물 줄기가 멈추어 선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설 때에도, 엘리야를 하늘로 올려보내고 요단강을 다시 건너 여리고로 돌아오는 엘리사의 이야기에서도 요단강물은 멈추어 섭니다. 이 이야기들은 성경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자연의 섭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그도 그를 것이 이미 과학적으로 기록된 것 만으로도 여러차례 요단강 물줄기가 끊어진 적이 있는데요, 가장 가깝게는 1927년에 요단계곡 여리고 북쪽 15km 지점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강 주변의 진흙들이 요단강을 덮치면서 요단강 물줄기가 몇 시간동안 멈추어 섰고, 그 외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1906, 1834, 1546, 1534, 1267, 1160년에 요단강물이 멈추어 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리고성의 함락도 그렇고, 요단강 물줄기가 멈추어선 것도 그렇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가늠하기가 참 힘든 것같아요.

신약성서에서 "요단강"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역시 요한일 겁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을 제외한 겸손과 낮춤의 아이콘은 역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의 역할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그늘 뒤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고, 그의 오심을 선포하며, 예수님의 사역과 동시에 역사의 뒷길로 사라져버린 요한이야 말로 신약성서의 가장 훌륭한 단역 배우이자, 조연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마지막은 매우 비참한 죽음, 아니 어찌보기에는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버렸지만 (그정도의 인물이라면, 하나님이 엘리야 처럼 승천을 시켜서라도 살려주실 법한데…), 세례자 요한 만큼이나 복음서에서 잔상을 주는 인물도 그리 흔하지는 않습니다.

흔히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세례의 원형 Proto-Type 을 유대인들의 정결의식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그 정결예식의 대표적인 예로 쿰란 공동체 (어떤 사람들은 "에세네파"라고도 부릅니다.)를 들기도 하지요. 세례의 원형이 유대인들의 정결례 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 하지만, 유대인들의 정결례와 기독교인들의 세례는 분명한 찾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쿰란 공동체와 요한의 세례를 예로 들어서 간단하게 비교하자면, 쿰란에 있었던 야하드 יחד 공동체는 세례식과 마찬가지로 날마다 정결욕조의 물에 스스로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자신의 부정함을 물로 씻어 내지만, 요한의 세례는 스스로가 아니라, 세례요한에 의해서 부어지는 물이었습니다. 쿰란의 공동체에서는 거룩한 공동체에 부합하는 자신의 부정함을 씻어내는 물이지만, 요한의 세례는 "자기의 과거를 버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자 다짐하는 이들의 머리에 부어지는 "결단"의 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결단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그래서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합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거룩한 공동체에게만 주어지는 쿰란의 공동체와는 달리, 모든 이들이 죄인이므로 이 죄로부터 돌아서고자 하는 용기있는 모든 이들이 물에 들어갈 수 있는 "고백"과 "과거로 부터의 단절"의 물이었으니, 이것 역시 쿰란의 공동체의 정결례와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내 과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삶을 결단하는 거룩한 회개와 고백의 예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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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베다니 요단강가에 나오셨습니다 (요 1:28). 그냥 친척인 요한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 나오신 것입니다. 요한은 당황했습니다. "정말 포기해야할 과거를 가진 이는 나인데, 왜 주님께서 내게로 오십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허락하라.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도 아마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포기해야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이냐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이 하나님의 "의"냐는 말이지요.

세례 요한처럼 저도 예수님께서 포기하셔야만 했던 과거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철저하게 사람이 되시기 위한 자기 비움을 예수님은 의라고 말씀하신 것같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의"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순종함"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지만, 그분이 스스로 하나님인 "예수님"에게 적용될 때에는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의지" "자신의 계획"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사람들이 허덕이는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를 끌어 올리시어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계획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신)이 가지신 신적인 지위와 특성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를 따르시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스스로 선택한 "내려놓음"과 "포기"가 예수님의 세례가 아니었나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주으심이라." (빌 2:6-8)

그러고보면,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던져주신 가장 처음의 메세지는 "내려놓음", "자기 비움", "포기" 였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욱 아는 척하게 되고, 내가 더 잘 보는 눈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점점 더 말이 많아지고, 내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되면, 점점 더 참견이 많아지고,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면 점점 더 지적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내려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는데 하물며 요한이 어찌 자기를 내세울 수 있었을까요? 한갖 헤롯의 딸의 요청으로 참수형을 당할 죽음을 앞둔 요한에게는 어떤 원망이나 아쉬움도 없을 것입니다. 이미 그는 자기보다 더 높으신 이의 "내려놓음"을 한 치도 안되는 바로 자신 앞에서 목격했으니 말입니다.John_the_Baptist_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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