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 이라고 하면 금붕어와 잉어떼들이 헤엄을 치고, 연잎이 둥둥떠다니는 그림을 상상하겠지만, 성경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연)못이라고 번역하기는 했어도, 사실 베데스다는 “물저장고” 였습니다. 일부는 야외에 노출된 곳도 있었고, 또 건물 아래, 실내에 있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대규모의 물저장고들이 꽤나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물저장고라고하면 성전 제의에서 사용되는 물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성전 마당 아래에 만들어 놓은 물 저장고를 들수 있겠고, 그 다음으로 단일 시설을 위한 물 저장고로 큰 것이 아마 베데스다였을 겁니다. 왜냐하면, 베데스다는 예수님 당시 병원으로 사용되던 장소였기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과 병원에서 수술과 치료에 사용될 깨끗한 물들이 많이 필요했고, 그 규모 역시 단일 건물로서는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서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만나셨다고 말하는데, 아마 이것은 “히브리 말"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원어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도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생긴 번역상의 혼동인 것같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아람어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거든요.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자애로운 마음으로 육체의 질병 뿐 아니라, 마음까지 보다듬을 수 있는 곳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자비의 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꼭 그랬던 것은 아닌 것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미쉬나 기록에 의하면, 이 베데스다는 로마의 신을 위한 장소이기도 했다고 하거든요. 그리스-로마 신화에 보면, “에스클리피우스” (Asclepius) 라는 신이 나오는데, 이 신은 약(藥)의 신이면서 동시에 의술의 신이기도 합니다. 병원에서 흔히 보는 그림 중의 하나인, 뱀이 지팡이를 뱅뱅 돌아 꼬며 올라가있는 그 지팡이가 바로 에스클리피우스의 지팡이 입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이 에스클리피우스로 추정되는 신상의 일부를 베데스다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병자들이 바랬던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에스클리피우스의 자비' 였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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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베데스다에서 38년동안 고통을 간직한 채 낫고자 하는 열망으로 물 곁에 앉아있었던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병자가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기다렸던 것이 하나님의 천사라고 딱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 요한복음 5장 3절과 4절에서는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라고 기록되었는데, 대괄호로 묶여 있는 이 이야기는 로마의 신화입니다! “천사"라는 표현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천사를 하나님의 천사로 오해하지만, 그리스어로 “천사"라는 말, “앙겔로스"는 “메세지"를 전하는 사람이나 신을 뜻하는 말로 메세지를 전하는 신적인 존재나, 사람 누구라고 가리킬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우스의 메세지를 사람에게 전하는 에스클리피우스 역시, 굳이 그리스어로 표현하자면, “앙겔로스"가 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사람이 기다렸던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물을 움직이고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에스클리피우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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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의 중앙이나, 어느 한 쪽에 세워져 있었을 에스클리피우스의 석상을 바라보면서, 그 돌덩어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기를 38년이나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하나님 섬기는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던 예루살렘, 그것도 바로 성전 옆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내려갈 때에 혹시나 다른 사람이 내려갈까봐 노심초사하는 그 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38년된 그 병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 그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에게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낫고자하는 그 간절함은 아마 처음 발병해서 다리를 쓰지 못했을 때부터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지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간절함이 있다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간절함을 이루고자 애닳게 바라보는 그 석상, 그 신화! 바라보고 있는 곳이 영 엉뚱한데, 그 간절함이 이루어질 리가 만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은 간절함이 그를 낫게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낫게 된 이유는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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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도 간절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남들이 도무지 상상하지도 못하는 애절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하는 것은 그 간곡한 간절함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이 성공 “신화”를 쫓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예수님이 계셔야하거든요. 헛된 신화를 쫓던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계신가요?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기다리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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