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표현의 방법은 제각기 다를지라도,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자기들의 아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별반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어린 아이들을 가스실로 보내던 나찌(Nazi) 군인들도 알고보면, 한 아내의 남편이자 사랑하는 자녀들을 둔 아버지 였습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자기들의 아들 딸 또래의 유대인 아이들이 이 비극적인 전쟁, 그리고 독일이 겪었던 정치, 경제적인 어려움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찌 그리 혹독하게 그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는지, 나찌 군인들의 양심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낮에는 수용소에서 아이들을 죽이는 사람으로,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 아이들을 입맞추고 돌보는 자상한 가장으로 살았던 나찌 군인들의 양심은 무엇으로 만들어 졌을까요?

심리학에서 “동조현상” 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정답이 확실히 이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선택한다면 자신도 그들에게 동조해서 오답을 선택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는 이론입니다. 즉, 집단(군중) 속에서 양심이 무뎌지고, 나중에는 나의 일상의 태도가 변질되어도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눈을 부릅뜨고 나를 철저하게 뜯어보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사무엘이 살았던 실로(Shiloh)는 교육적으로 좋은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여호수아의 주도로 회막을 세웠던 곳이 실로이고 (수 18:1), 사무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몇 백년동안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였던 실로가 교육적으로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이 참 역설적입니다. 이런 비교육적 환경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엘리였습니다.

엘리는 두려워할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2:29). 엘리의 두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정해준 몫이 아닌 것에 대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손을 댔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을 자기의 것을 삼았습니다 (삼상 2:13-17). 성(性)적으로도 타락을 하였습니다 (삼상 2:22). 그런데 그쯤되면, 아버지 엘리가 아들들에게 회초리를 들어야 했어요. 그런데 엘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들들이 무엇을 하든 방치해 버린겁니다. 아예 신앙교육이라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엘리와 그 아들들의 무뎌진 신앙의 양심 때문에 이제 이스라엘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마저도 희귀하여졌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엘리와 대화하지 않으셨는데 (삼상 3:1), 엘리와 그 아들들은 그것에 대한 어떤 긴장감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홉니와 비느하스의 오만방자함은 마치 그들이 하나님인양 생각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혈통으로는 엘리의 집안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지라도, 사무엘은 마치 그 집의 식구와 마찬가지로, 엘리의 아들들과 함께 자랐고, 그들의 부정한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 먹고 싶은 것을 먹을 때,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릴 것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홉니와 비느하스, 또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던 엘리 가정의 무절제한 틈바구니에서 사무엘은 그들에게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짧은 인생 쉽게 살려면, 누군가로부터 질투를 받지 않으려면, 그냥 그들처럼 살면 훨씬 편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렇게 하는데, 나 정도야…”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엘리가 듣지 못했던, 날카로운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삼상 3).



결국 엘리 집안의 타락이 곧 하나님의 집이 있었던 실로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고, 그 전쟁 통에 엘리의 두 아들들은 죽습니다. 엘리는 아들의 죽음 소식과 하나님의 궤가 빼았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이 부러져 죽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그 이후로 실로는 역사 속에서 그런 곳이 있었나 싶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폐허가 되어 버린 실로를 가리키며 역사 속에서 유다가 나아갈 길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렘 7:12). 실로가 무너졌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단절된 것은 아닙니다. 역사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환경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던 사무엘의 손에 의해서 또 다른 새 역사가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해에 새 역사를 쓰기 기도한다면, 우리가 따라야할 모범은 사무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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