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세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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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7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고 찾는 하나님, 그리고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얼마나 놀라울까요.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와 동행하심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기도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주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모두에게" 정말 복이고 즐거움일까요?
두 마리의 암소가 무언가를 싣고서는 블레셋 평야 저 멀리서 오고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그 모습을 보고서는 무언가 보려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그 수레에는 하나님의 궤가 실려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행복했을까요? 일곱 달 전에 전쟁 터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법궤를 아무런 피흘림 없이 다시 찾았을 뿐 아니라(삼상 6:1), 거룩한 법궤가 자기 마을로 들어왔으니 말이지요.
[caption id="attachment_1807" align="aligncenter" width="3728"] 벧세메스의 앞을 지나가는 골짜기의 왼쪽은 블레셋 평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예루살렘 산지로 올라가는 길이다.[/caption]
율법에 따르면, 성막의 성소에서 제사장들, 그것도 대제사장만 법궤를 일년에 한번 속죄일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법궤를 보는 것이지, 그 법궤의 뚜껑인 그룹이 앉아 있는 속죄소는 볼 수 없었고, 법궤의 안쪽을 들여다 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레 16). 대제사장이나 볼 수 있는 법궤를 레위인도 아닌 벧세메스의 주민들이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기쁨에 넘친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수레를 패다가 장작을 만들고, 끌고온 암소들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삼상 6:14).
악몽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지켜야할 법도가 있습니다. 소로 드리는 번제라면 흠이 없는 수컷으로 드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레 1:3).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율법을 몰랐는지, 아니면 알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나름대로 좋은 것, 값어치 있는 것을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그랬는지, 수레를 끌고 올라온 암소들을 번제로 드린 거예요.
게다가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나 더 벌였습니다. 법궤를 싣고 온 수레 위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의 수많큼 보낸 쥐모양의 금덩이들이 상자에 담겨 있었는데, 아직 법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터라, 다른 이스라엘의 주민들에게 말하지만 않는다면, 그 쥐모양의 금덩어리들은 벧세메스 사람들의 것이 되리라는 욕심에 또 다른 욕심이 생겼나 봅니다. 법궤 안에 그 금덩어리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는 무언가가 들어가 있으리라 기대감을 가지지는 않았을까요? 벧세메스의 주민들은 너나 할 것없이 그 법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70명이 죽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제서야 자기 마을에 법궤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알리고 옮겨 가주기를 간청했습니다(삼상 6:21).
임마누엘! 그 말처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늘 동행하신다면, 그 삶은 복을 받고 늘 은혜 가운데 있으리라 막연한 상상을 합니다(삼하 6:11).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나(임마누엘), 그 분을 통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보려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할 바를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벧세메스에서 다시 기억해 봅니다.
두 마리의 암소가 무언가를 싣고서는 블레셋 평야 저 멀리서 오고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그 모습을 보고서는 무언가 보려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그 수레에는 하나님의 궤가 실려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행복했을까요? 일곱 달 전에 전쟁 터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법궤를 아무런 피흘림 없이 다시 찾았을 뿐 아니라(삼상 6:1), 거룩한 법궤가 자기 마을로 들어왔으니 말이지요.
[caption id="attachment_1807" align="aligncenter" width="3728"] 벧세메스의 앞을 지나가는 골짜기의 왼쪽은 블레셋 평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예루살렘 산지로 올라가는 길이다.[/caption]
율법에 따르면, 성막의 성소에서 제사장들, 그것도 대제사장만 법궤를 일년에 한번 속죄일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법궤를 보는 것이지, 그 법궤의 뚜껑인 그룹이 앉아 있는 속죄소는 볼 수 없었고, 법궤의 안쪽을 들여다 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레 16). 대제사장이나 볼 수 있는 법궤를 레위인도 아닌 벧세메스의 주민들이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기쁨에 넘친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수레를 패다가 장작을 만들고, 끌고온 암소들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삼상 6:14).
악몽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지켜야할 법도가 있습니다. 소로 드리는 번제라면 흠이 없는 수컷으로 드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레 1:3).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율법을 몰랐는지, 아니면 알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나름대로 좋은 것, 값어치 있는 것을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그랬는지, 수레를 끌고 올라온 암소들을 번제로 드린 거예요.
게다가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나 더 벌였습니다. 법궤를 싣고 온 수레 위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의 수많큼 보낸 쥐모양의 금덩이들이 상자에 담겨 있었는데, 아직 법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터라, 다른 이스라엘의 주민들에게 말하지만 않는다면, 그 쥐모양의 금덩어리들은 벧세메스 사람들의 것이 되리라는 욕심에 또 다른 욕심이 생겼나 봅니다. 법궤 안에 그 금덩어리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는 무언가가 들어가 있으리라 기대감을 가지지는 않았을까요? 벧세메스의 주민들은 너나 할 것없이 그 법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70명이 죽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제서야 자기 마을에 법궤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알리고 옮겨 가주기를 간청했습니다(삼상 6:21).
임마누엘! 그 말처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늘 동행하신다면, 그 삶은 복을 받고 늘 은혜 가운데 있으리라 막연한 상상을 합니다(삼하 6:11).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나(임마누엘), 그 분을 통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보려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할 바를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벧세메스에서 다시 기억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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