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호세아, 아모스, 요나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셨나요? 북왕국 출신의 호세아, 남왕국 출신의 아모스, 그리고 정확히 그 출신을 알수 없는 요나, 예언자라는 것을 제외하고 이 세 선지자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연결 고리를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지나쳤을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동시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북왕국과 관련하여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 시대가 여로보암 2세의 때입니다.

알고보면 여로보암 2세도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리 익숙한 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흔히들 축구에서 “언성 플레이어” Unsung Player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 실력에 비해서 저평가된 선수 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딱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로보암 2세가 바로 그 “언성 플레이어”입니다. 여로보암 2세가 대단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뛰어난 왕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잘 모른다는 입장에서 말이지요.

아합 왕조를 끝낸 예후의 증손자인 여로보암 2세는 8세기 초반과 중반에 걸쳐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습니다. 흔히들 통일 왕국 시대(사울, 다윗-솔로몬)와 분열 왕국 시대(솔로몬 이후)를 통틀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왕을 꼽으라면, 다윗과 솔로몬을 으뜸의 자리에 놓지요. 그 다윗-솔로몬의 치세에 확장하고 얻었던 영토를 그대로 다시 복원했던 유일무이한 왕이 여로보암 2세입니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를 세 단어로 요약하면, “부흥, 그리고 평화와 번영”입니다. 북왕국의 왕들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감히 “부흥, 그리고 평화와 번영”이라는 엄청난 단어들을 여로보암 2세에게 붙일 수 있을까요?

여로보암 2세의 시대는 앗시리아의 왕, 아수르-니라리 5세 (Assur Nirari V, 755-745 BCE)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 앗시리아의 왕은 궁중의 고위 관료들의 막강한 힘에 눌려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고대 앗시리아의 기록에는 매년 마다 왕들이 주변의 나라들을 원정하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다른 제국에 비해서 앗시리아는 원정한 나라들과 도시들의 명단, 그리고 그들로부터 탈취한 전리품과 공물들이 이야기들을 주로 기록합니다. 이것은 왕권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수르-니라리 5세 때의 기록에는 무려 4년이나 아무런 원정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땅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권이 강력하지 못했고, 신하들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받지 못한 왕이었다는 역사가의 평가가 숨어 있는 거지요. 결국은 그의 형제, 또는 아들이었을 티글랏필에셀 3세 (Tiglath-Pileser III, 왕하 15:19 “불”)에 의해서 강제 폐위됩니다. 이 앗시리아 혼돈의 시대가 여로보암 2세의 시대였고, 여로보암 2세는 앗시리아가 무질서와 불안 속에 있을 때, 그 영토를 앗시리아의 입구까지 확장하였습니다 (왕하 14:25). 41년에 걸친 여로보암 2세의 통치는 그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 (왕하 14:27)의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열왕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여로보암 2세를 참 야박하게 평가합니다. 다윗-솔로몬의 치세를 회복하고, 이스라엘을 부흥시켰으며, 북왕국 이스라엘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준 이 뛰어난 왕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를 범하도록 부추긴 자”,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여로보암 1세)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자”라고 질책한 것이지요 (왕하 14:24).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나는 뚜렷이 북왕국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지만,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이스라엘을 남편을 버린 음란한 여인으로 (호 1-3), 아모스는 정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넘쳐나는 왕국으로 묘사했습니다 (암 2). 왜 그랬냐고요? 하나님의 눈은 사람들의 눈과는 달랐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오랜 세월을 산다는 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은 사람이라는 증거로 생각했습니다. 오래 살았다 뿐인가요? 왕으로서 오랜 기간 동안 통치했다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왕이라는 증거로 여겨졌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말 그리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삶”과 “오래 통치함”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관점일 뿐입니다. 나라가 부강하게 되어서 영토가 넓어지고 왕궁과 성전의 창고에 값진 것들이 넘쳐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었을 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던 예언자들의 눈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부흥, 평화, 번영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해 나아가고 있는지(신앙), 그들의 사법적인 정의가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았을 때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사회)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고고학 발굴 100년의 역사를 통틀어, 안타깝께도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유물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 중의 하나가 여로보암 2세 시대의 고위 관료였던 “쉐마”(שמע)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인장입니다. 1904년에 독일계 이스라엘 사람인 고틀리프 슈마허(Gottlieb Schumacher)가 텔-므깃도(Tel Megiddo)를 발굴하면서 벽옥(Jasper)으로 만들어진 이 인장을 발굴하였습니다. 사자가 포효하고 있는 아름다운 인장은 지금까지 발굴된 인장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장이라고 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구약 학자라면 누구라도 잘 알고 있는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Supplement Series가 1976년부터 이 인장을 로고로 사용하고 있고, 이 인장이 발견된 므깃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이곳 저곳에서 이 인장이 새겨진 티셔츠와 기념품들이 판매될 정도로 정말 인기가 많은 인장이 바로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살았던 쉐마의 인장입니다. 이 인장이 발굴될 당시는 팔레스타인 땅(현재의 이스라엘 땅)이 오토만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발굴된 이 유물은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오토만 제국의 술탄에게로 갔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문장의 가치를 술탄이 몰랐습니다. 그래서 술탄의 유물 창고 어디엔가 방치 되었을까요? 그 이후로 이 인장의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인장의 행방에 대한 많은 소문들이 있지만, 확실하게 알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참 안타깝습니다. 여로보암 2세 시대를 증명하는 최고의 유물이자 여로보암 2세의 이름이 새겨진 유일한 유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진 유물을 보자니, 부흥, 평화, 그리고 번영을 이루었던 여로보암 2세의 시대를 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호세아와 아모스가 예언했던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사라짐”의 예언이 이렇게 성취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여로보암 2세와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부흥을 꿈꾸고, 평화를, 그리고 번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눈에 흡족한 것이 아니라, 당장의 내 삶의 윤택함과 여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사라져버린 여로보암 2세의 인장처럼 곧 신기루와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이 인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려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Bolen, Todd. “The Reign of Jeroboam II: A Historical and Archaeological Interpretation.” Th.M. thesis., The Master’s Seminary, 2002. Shanks, Hershel. “First Person: Have You Seen This Seal?”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6[1] (2000): 4.

므깃도 인장 (쉐마의 인장) 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