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페이스북을 하다가 우연하게 "십일조"에 대한 뉴스 기사가 링크되었길래 그 선동적인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 고발하면서 "십일조 무용론"에 가까운 성토를 보았습니다. 교회의 재정 운영에 대한 투명한 집행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십일조가 오늘날 교회의 상황에서 필요없다는 논조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기사를 작성한 이의 십일조에 대한 주장에 댓글을 통해서 누군가가 반박할만도 했는데, 대부분 목회자가 읽는 (목회자들이 주로 읽는다고 추정) 웹신문에 이렇다할 논리적인 대응이 없어서, 혹시 "십일조 무용론"이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은 아닌가하는 걱정에 "왜 십일조가 우리 신앙생활에서 필요한가?"에 대해서 성경을 근거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십일조라는 말은 어떤 뜻인가?


십일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아세르" מעשר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10이라는 숫자를 "에세르" עשר 라고 하는데, 그 십분의 일을 가리키는 단어가 "마아세르"입니다.

 

2. 십일조는 구약의 오경(율법서) 중에서 어디에서 나오는가?


2.1. 십일조에 대한 일화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14장입니다.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쳐들어와 롯과 그 가족 그리고 그 재물들을 노략해서 갔을 때에 롯을 구하러 간 아브라함이 단까지 쫓아가서 쳐부수고 데메섹 왼편의 호바까지 쫓아가서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롯과 가족을 다 찾아온 후에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멜기세덱에게 "마아세르"를 줍니다 (20절).

2.2. 또 야곱은 베델에서 잠을 자던 중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십일조를 서원합니다 (창 28장).

2.3.그 다음으로 십일조를 말하는 곳은 레위기 27장입니다. 레위기 27장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나는 곡식과 나무의 열매의 십분의 일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은 거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30절).

2.4. 민수기 18장에서는 레위인들이 드려야할 십일조에 대해서 말합니다. 레위인은 땅을 분배 받지 못한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기대에서 할 수 있는 생업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회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주어서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합니다 (21절). 그런 레위인들 조차도 그들이 받은 것에서 다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한다(26절)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는 이야기입니다.

2.5. 율법서의 맨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서는 세 곳에서 십일조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 첫번째는 신명기 12장인데요. 곡식과 포도주, (올리브) 기름의 십일조에 대한 규정을 이야기하면서 (17절), 이것을 소비하는 주체가 십일조를 가져온 사람과 그 가족들, 그리고 그 가족에 속한 노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18절). 그리고 이 십일조를 다 함께 먹을 때에는 아무 곳에서나 먹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먹을 것이며,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성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으라고 말합니다 (19절).

2.6. 신명기 14장에서는 십일조 규정을 좀 더 자세하게 다룹니다. 매년마다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면서 (22절), 구체적으로 곡식, 포두주, 그리고 (올리브) 기름을 이야기합니다. 신명기 12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는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이 십일조를 가져온 사람과 노비를 포함한 모든 식솔들이 함께 먹는것이 원칙인데, 이 때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성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이들이므로 잊지 말고 함께 나눌 것을 명령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12장과 거의 동일하지요. 다른 곳에서는 없지만, 신명기 14장에서 말하는 특별한 십일조 규정은 (1) 드려야할 곳이 너무나 멀어서 십일조 소산의 양이 너무 많아 가져가기가 힘들 경우, 드릴 십일조를 팔아서 돈으로 환전을 한 후에, 그 돈으로 십일조를 드릴 그 곳에서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2) 삼년 째에 드리는 십일조는 그냥 가족들이나 레위인들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저축을 해 놓았다가 레위인을 포함하여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나그네들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 삼년 째에 드리는 십일조에 대한 규정은 신명기 26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12절).

 

3. 십일조를 말하는 이야기 또는 법령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J E P D
창 14:20 창 28:20-22 레 27:30-32; 민 18:21-28 신 12:6-17; 14:22-28; 26:12-13

십일조의 이야기와 법령은 J, E, P, D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학대학교에서 이미 배운대로 알다시피 J와 E 는 원인론적인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왜 해야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창 14장에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P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십일조에 대한 제사장 (또는 레위인)의 태도에 대해서 규정합니다. D는 목축중심에서 상업중심으로 경제의 무게가 바뀌어 가는 갈림길에서 생겨난 사회적인 문제를 하나님의 율법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각 자료들의 특징을 중심으로 십일조를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3.1. 십일조를 왜 해야하는가? 원인론적인 이야기 (J)


십일조와 비슷한 제도는 이미 고대 서아시아 지역의 많은 나라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의 이집트, 바빌론, 앗시리아, 엘람, 페니키아에서는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그들의 신에게 바쳤거든요. 이스라엘의 이웃들 가운데에서 가장 이스라엘과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가나안의 사람들의 문화에서도 역시 십일조의 풍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문서적으로 발견되지 않은 우가릿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고대 서아시아의 나라와 심지어는 좀 멀다할 수 있는 그리스까지 신들에게 바치는 십일조 제도들을 찾아볼 수 있으니, 십일조라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 만의 제도가 아니라, 고대 제국들이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인 제도였다는 겁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 제도는 일종의 "세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두개의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종교적인 영역에서의 십일조입니다. 이 흔적은 창세기 14장에서 아주 잘 묘사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이 종교적인 지도자였던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십일조입니다. 이것은 왕정이 세워지고 정치제도가 만들어진 후에 왕에게 바치는 십일조인데, 사무엘이 왕의 제도를 설명하면서 왕의 백성들의 의무를 열거하며 국고로 들어가는 십일조의 의무를 말합니다 (삼상 8장).


왕에게 세금을 내는 이유는 세금을 내는 이가 그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일이면서, 동시에 의무입니다. 왕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으면서 그 백성을 돌보는 책임이 주어지고, 백성들은 자기의 주인이 되는 왕에게 세금을 냄으로 그 충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령, 두 왕국의 경계가 되는 지역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도대체 어느 왕국에 속해 있는가 알아보고자 한다면, 그 마을 사람들이 어느 왕국의 관리에게 세금을 내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십일조를 왜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것은 드리는 이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드림으로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3.2. 십일조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원인론적인 이야기 (E)


창세기 28장의 베델에서 야곱이 만난 하나님의 이야기는 십일조가 자발적인 헌신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후에, 광야에서 받은 율법들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법률로서 체계화 되었지만, 그 이전의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법적 강제에 의해서 반드시 드려야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3.1.의 이야기와 3.2.의 원인론적인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서 살펴보면, 십일조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며,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각인 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3. 십일조의 의미, 그리고 그 용례들 제사장들을 위한 지침 (P)


제사장 문서 (P) 는 제사장들이 '제의'라는 영역에서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준 지침서이면서, 동시에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러주어야할 가르침이었습니다. 곡식 뿐 아니라, 가축도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만약 십일조로 드려진 것을 물려야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이 이들의 책에 담겨져 있습니다 (레 27:30-32).


십일조의 용처는 레위 (제사장) 자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경제적 이유. 이들은 땅으로 받을 유산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회막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거룩함은 그들에게 있지만, 그러한 종교적인 거룩한 자부심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털이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는 아무것도 없는 레위인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거룩한 노동에 대한 보수인 것이지요. (민 18:21-28).


종교적 이유.  다른 측면에서 또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거룩한 성물인 십일조는 그 자체로 매우 거룩했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것을 아무나 만지거나 다룰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사장의 신학에서 거룩한 시간은 안식일과 명절이며, 거룩한 물건은 성막에서 사용되는 기구들과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것들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을 배출하고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이지요. 거룩한 것은 그렇지 않은 것들과 접촉하게 되면, 곧 그 거룩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제사장의 신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이들만이 거룩한 물건과 접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막에서 일하는 이들만이 그 거룩한 예물인 십일조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십일조가 레위인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은 제사장의 신학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의 십일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제사장들 역시 십일조는 드려야했습니다. 그들이 받은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민 18:21-28). 십일조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보수였다고해서, 내 손에 들어온 그 십일조를 내 맘대로 처리하고나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회막에서 일하고 받은 보수일지라도 그 십일조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서 성물로 드려진 것이기에 비록 사유재산이 된 십일조라고 할 지라도 그 거룩함에 손상이 가지않도록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민 18:32).


3.4. 상업화된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하나님이 도우시는 방법 — 십일조 사용의 지침 (D)


제사장의 신학에서 십일조의 사회적인 의미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일할 수 없는 레위인들을 돕기위한 제도였습니다. 레위기와 민수기의 배경이 되는 광야 유랑의 시대에는 경제구조라는 것이 매우 간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먹는 것에 대해서 무엇을 먹고 마셔야할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주거환경은 척박했지만, 경제환경은 그야말로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들어가서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도 더이상 없습니다. 예전에는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 한가지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남들보다 조금 더 있다고 해도, 그보다 조금 더 먹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며 살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의 경제구조가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생겨나고, 노예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인구는 점점 늘어났고, 십일조로 드려지는 곡식과 가축의 수도 부쩍 늘었습니다.


이렇게 사회의 구조가 바뀌면서 십일조도 그 쓰임새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시작한 제사장의 신학은 거룩한 제사장이 가지는 성물에 대한 거룩한 책임감이 가장 우선 순위였고, 거기에 구제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었지만, 제사장 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이 거룩하다는 신학을 가지고 있는 신명기에서는 십일조의 소비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를 가져간 "나"도 그 십일조의 일부를 제사장과 함께 소비하고, 경제적인 약자인 레위인과 노예, 과부, 고아, 나그네들 역시 사회적인 구제의 일환으로 함께 나누게 된 것입니다 (신 12:6-17; 14:22-28; 26:12-13). 그러니, 좀 짧게 말한다면, 거룩한 성도들의 교제와 박애적인 입장에서의 구제가 십일조의 중요한 역할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4. 끝맺음: 성서가 말하는 십일조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십일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느 구절을 펴놓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해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구절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배경, 신학적인 배경을 이해한다면 십일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인론의 이야기만으로는, 제사장의 신학만으로는, 신명기의 신학만으로는 십일조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네 개의 신학을 정리해서 하나로 엮어보자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인 동시에 (J, E),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지켜야하는 의무 (법)이며 (P, D), 거룩한 십일조는 그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매우 소중히 다루어야하고 (P), 그 사용 역시 거룩한 공동체의 거룩한 교제와 구제를 위해서 사용되어야한다 (D).

는 것입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십일조는 사라져야한다."는 괴이한 논리는 아마도 십일조의 사용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에 쉽사리 휩쓸리지 말고, 오히려 "성도로서" 십일조의 원래의 의미에 충실하게 오늘날 내가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지, "교회로서" 십일조를 원래의 취지에 맞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반성해야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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