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사용하는 말 가운데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암호화된 말이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들이 자기들만의 말이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기독교 공동체는 예전(禮典)에서 사용하는 말을 제외하고도, 기독교인들 조차도 생소한 말들(대부분 소그룹들이 창조적으로 만들어낸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언어는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입니다. 그래서 신조어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새로운 일도,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말들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고 정확하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많이 또 때로는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한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지않나 싶습니다.

 

❖ 일반적인 의미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지리적 입장에서/인종적인 입장에서 넓게 사용되어지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자면,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은 지중해의 서쪽에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 쌓여 있는 작은 나라(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를 합친 것보다 조금 큰 면적)를 가리킵니다. 인종적인 관점에서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정의들이 이스라엘을 가감없이 그대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리적으로 말하는 이스라엘이 현대 국가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서에서 열 두지파가 차지하였던 땅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분명치 않으며, 인종적으로 현대의 유대인을 과연 성서의 이스라엘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는 더욱 복잡합니다. 잠시 유대학을 공부해 보았던 저도 이 문제를 가지고 한 학기를 배웠지만, 결론은 늘 해석자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말할 때에는 말하는 이가 상정해 놓은 ‘이스라엘’의 의미를 먼저 밝혀주어야 듣는 이가 오해가 없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672" align="aligncenter" width="3184"]이스라엘 정보 2014년 기준 이스라엘 개략정보[/caption]

한국 교회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사람들(제가 겪어본 사람들이나 인터넷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열정적으로 전파하는 인터넷 매체, 또는 인터넷 싸이트)에게 이스라엘은 “1948년에 세워진 현대 국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면서 동시에 인종적으로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중에서 43%가 살고 있는 “현대국가 이스라엘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하는 한국 교회의 공동체들이 마치 유대인 민족주의자들처럼 보여지거나, 그 공동체들이 주창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말이 21세기판 기독-시오니즘 운동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주장’이 아니라, “성서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말하는가?”(성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정의)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최대한 학술적인 표현을 쉽게 바꾸었고, 논증이 아닌 설득을 위한 어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보다 정확한 설명을 위해서 참고한 책들과 아티클들은 글의 끝부분에 소개합니다.

 

❖ 이스라엘 vs 야곱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 32:26-28)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창 35:9-13)

창세기 32장과 35장에서 말하듯이, 이스라엘은 야곱의 다른 이름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때는 삼촌 라반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야곱이 그 집을 떠나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였습니다. 평생 남의 뒷꿈치나 잡으면서 (야곱이라는 이름의 어원)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떤 권모술수라도 다 쓰리라!’며 살아갔던 야곱의 인생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바뀝니다. 그저 사람(형 에서)에 대한 공포로 두려워 살고자 발버둥쳤던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과 얍복 강가에서 뒤엉키며 자기의 인생의 기준점이 바뀐 것입니다. 정말 두려워 해야할 분을 비로서 알게된 것이지요. 평생 절름발이로 살지언정,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면서 받은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12지파의 연합공동체)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들은 야곱을 12지파의 조상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을 그 자손들 모두를 아우르는 공동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만, 선지자 이사야는 성서의 이야기가 소개하는 두 이름의 차이를 근거로 ‘이스라엘’과 ‘야곱’이라는 이름이 동시에 나올 때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긍정적으로, ‘야곱’이라는 이름은 부정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전통은 랍비들이 그대로 이어 받았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과 야곱의 차이에 대해서 초기의 성서해석자들은 매우 분명한 해석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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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성서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1) (에서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땅의 삶에 초점을 두고 살던 과거를 버리고, 그 지향점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2) 인생의 기준이 바뀐 선조를 따라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그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

그럼, 성서가 말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재의 유대인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이라는 말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해야할 것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을 민족, 또는 인종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합니다. 그러다가 검은 피부, 누런 피부의 유대인들을 만나면 매우 당황하지요. 그들의 생각에 유대인들은 하얀 피부를 가진 단일민족이거든요. 오히려 과거 성서에 기록된 인물들은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가졌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럼 정말 성서에서는 단일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성서 기록의 역사적 순서로 보아서 가장 처음 “유대인”(히. 예후디 יהודי)이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은 예레미야입니다 (렘 32:12; 34:19; 38:19; 40:11-12; 41:3; 43:9; 44:1; 52:28,30). 예레미야는 유대인이라는 말을 “유다 땅(왕국)에 사는 사람, 또는 유다 땅에 살던 사람”을 가리킬 때에 사용하였습니다. 즉, 유대인은 민족이나, 인종의 개념이 아니라, 유다라는 특정한 영토에 거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유대인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지리적인 입장에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유대학에서 논쟁적인 이슈 중의 하나는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인가, 아닌가?”하는 문제입니다. 당연히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 역시,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사마리아 유대인’이라는 표현은 모순입니다.

로마 시대에도 여전히 유대인은 인종이나 민족의 개념이 아니라, 로마의 속주 유대아(Judea)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말이 마치 민족적인 개념으로 확정된 것은 기원후 2세기 이후입니다. 그 때는 하드리안 황제(117-138 CE 재위)가 로마의 속주 유대아 Judea를 팔레스티나 Palestina로 이름을 바꾼 뒤 부터였습니다.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살던 유대아 땅에 살던 사람들이 성서의 블레셋을 연상시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로 불려지는 것으로부터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유대인”이라는 말은 원래는 지리적인 입장에서 “유다(유대아) 땅에 살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역사적인 특수성 때문에 마치 민족을 가리키는 단어로 바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675" align="aligncenter" width="757"]예수님 당시의 지역 구분. 하드리안 황제(117-138 AD) 때까지 이 지역에 대한 명칭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가 하드리안 황제 재위 기간에 일어난 바르 코흐바의 반란(132-136 AD) 이 후, 유대인의 정체성을 희석 시키기 위해서 속주의 명칭을 유대아 Judea 에서 팔레스티나 Palestiana 로 바꿔 버렸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는 말도 로마의 땅 팔레스티나에 살던 사람들, 또는 그 땅에 살아오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 당시의 지역 구분. 하드리안 황제(117-138 AD) 때까지 이 지역에 대한 명칭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가 하드리안 황제 재위 기간에 일어난 바르 코흐바의 반란(132-136 AD) 이 후, 유대인의 정체성을 희석 시키기 위해서 속주의 명칭을 유대아 Judea 에서 팔레스티나 Palestiana 로 바꿔 버렸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는 말도 로마의 땅 팔레스티나에 살던 사람들, 또는 그 땅에 살아오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caption]

지리적인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의미를 본다면, 어떨까요? 이미 유대인(유다 사람)에 대해서 앞서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말을 지리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북왕국 이스라엘에 살던 사람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 예들은 북왕국이 멸망한 후에, 북왕국과 남왕국을 향한 예언들(주로,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도)에서 흔하게 발견됩니다. 역사의 격변기에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을 북왕국을 가리키는 말, 유다는 남왕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위에서 설명한 대로, 신앙적인 의미의 이스라엘은 (1) (에서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땅의 삶에 초점을 두고 살던 인생이 그 지향점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2) 인생의 기준이 바뀐 선조를 따라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그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고, 지리적인 입장에서의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살던 사람을 가리킬 때에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언자들은 때때로 남왕국과 북왕국이 한 때 하나의 나라였던 때를 기억하며, 이 두 왕국을 하나로 엮어 이스라엘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다윗이 다스리던 지역에 다윗의 통치 아래에서 살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지리적인 명제였습니다.
⦁ (에서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땅의 삶에 초점을 두고 살던 인생이 그 지향점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사람 ⦁ 인생의 기준이 바뀐 선조를 따라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그 후손들 ⦁ 북왕국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들 ⦁ 다윗의 통치 아래에서 살던 사람들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성서가 말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현재의 유대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한국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적인 의미의 이스라엘 보다는 지리적인 입장의 이스라엘을 더 중시하고 있으며,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 또는 다윗의 통치 아래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오늘날 현대 국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혼동하고 있는 듯합니다.

❖ 아브라함은 유대인이다? 히브리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창 22:16-18)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하고, 그들을 도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단체 가운데에서는 시오니즘 운동의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로 돌아와 정착하려는 유대인들에게 정착 지원금을 후원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국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유대인은 약속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조상이며, 아브라함은 유대인일까요? 적어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16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6-18)

유대인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신 여러분이라면 벌써 눈치 채셨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는 오늘날의 이라크 사람이며 오히려 생김새는 아랍인에 가깝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성서에서는 출애굽한 히브리 공동체가 모압 광야에서 아브라함을 포함한 자신들의 선조들을 아람 사람이었다고 스스로 정의합니다. 굳이 아브라함을 인종적으로, 또는 민족적으로 정의하려고 한다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아람 사람이 아니라, 우르 사람, 또는 수메르 사람이어야 한다는거지요. 그런데, 신명기를 기록한 이는 자기들의 가장 중요한 선조인 아브라함의 출신지를 말하면서 아람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니, 참 난감합니다. 왜그랬을까요?

성서를 기록한 이는 아브라함이 어디 출신이고, 인종이 어떻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서는 아브라함을 생소하게도 “히브리 사람”(창 14:13)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 정체성입니다.

“히브리” עברי 라는 말은 “건너다”라는 어근을 가진 말인데, 지리적으로 따지자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사람이라는 말이고, 신앙적으로 말하자면, “과거를 결연하게 끊어버린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기 이 전에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땅, 하란이 아람 지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난 것은 장한 일이지만, 아브라함의 가족은 가나안에 이르지 않고, 하란에 주저 앉았습니다. 하란에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은 아직 히브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람 지역에살고 있는 사람(아람 사람)일 뿐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그가 비로서 히브리 사람이 됩니다. 아람인으로 살았던 과거를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인종이나, 출신 지역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가 어떤 민족이든, 그가 어떤 인종이든, “하나님 없이 살아간 과거를 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함께 새롭게 살아가겠노라고 새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히브리 사람인 것이지요. 성서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마치 민족처럼 말하기는 하지만,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의 원래가 그렇다는 겁니다.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신 26:5)

[caption id="attachment_1676" align="aligncenter" width="1975"]아브라함의 이동경로 아브라함의 이동경로[/caption]

❖ 히브리 vs 이스라엘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이라는 말과 히브리라는 말의 공통점을 이미 찾으셨을 겁니다. 이 두 말, 모두가 땅의 삶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없이 살아갔던 과거를 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살기로 작정한 사람과 그 사람과 더불어 그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그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히브리 사람)과 그의 자손(히브리 사람들)에게 준 약속은 현대의 유대인에게 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처럼 히브리 사람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그 길을 걷는 이들 (히브리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스라엘처럼 인생의 목표와 삶의 지향점이 바뀐 사람들(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 누가 참 이스라엘인가? (신약성경)

바울도 아람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이 히브리인이 되었던 역사를 위와 같이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도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 3:6-9) 6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6-8)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며,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29)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이스라엘로 불리는 것은 민족, 혈통을 기준으로 삼아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 안락한 하란의 삶의 버리고, 또 과거를 결연히 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새 삶의 유일한 나침반이라는 믿음을 가진 이들(히브리인)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복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혈통으로 따진다면이야,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복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마땅한 이로 지목한 이는 온전한 믿음,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이삭이었고, 그래서 이삭이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을 때에, 비록 로마 사람일 지라도, 또 갈라디아 지방의 사람일 지라도, 이스라엘이 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 마치면서-우리가 회복해야할 이스라엘

오늘날 유튜브와 인터넷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검색하면, 정말 많은 정보와 설교, 심지어는 영화까지 나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많은 정보들 가운데에는 예언-성취라는 틀을 무리하게 끌어다 놓고 지나친 해석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 이미 성취된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들을 굳이 끄집어 내어서, 이미 성취된 예언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루어 질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유대인 선교의 중요성와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대부분 이런 설교나, 정보, 영화들은 이스라엘을 좀 안다고 자칭 하는 사람들이 많고, 수차례 방문한 것을 강조하며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것 처럼 이야기하거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자들의 예언에 대해서 권위있는 풀이를 내어 놓는 것 같아 성서의 이스라엘과 “아브라함(히브리 사람)에게 준 복”을 잘 모르는 교인들을 유혹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입장에서 “현대 국가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메세지를 회복하고, 그의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소중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일부에서 종말론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현대 국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곧 성서의 “이스라엘”이라는 틀을 만들어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런 편협한 정보는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이 마치 혈통, 인종, 민족적으로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현재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 준 것”이라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원래 의미의 이스라엘과 아브라함(히브리인)의 자녀들을 잘못 이해해서 지나치게 단순화한 나머지 자칫 방향을 알 수 없는 유대인 선교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정치적으로는 중동의 미묘한 정치 상황에 종교라는 틀까지 더해서는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보수 정치인들이 말하는 극단적인 정치 슬로건(이스라엘 내, 이슬람인들에 대한 편견)을 차용하기도 합니다. 또 종교적으로는 이스라엘 선교를 위해서 파송받은 선교사님들이 유대인 중심으로 역사하실 하나님을 오히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거지요.

이방인 선교와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반대했던 초대 교회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처럼, 인종과 민족을 구별하고 ‘다름’을 말하던 초대 교회의 유대인들처럼, 구원의 중심에 유대인들을 세우고,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모이라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온전해 진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2,00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시도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이스라엘”로 돌아간다면,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기억한다면, 유대인이 선민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이 살았던 과거를 버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오직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 내가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회복해야할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과거에는 삶의 지향점이 땅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추구하는 목표가 물질적인 성공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친구와 동료와의 관계였습니다. 과거에는 쉼이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여행이나, 잠이었습니다. 공부하고, 배우고, 돈을 벌어서 내가 너와 다르다는 것, 내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나와 동행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모범이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된 후에는 삶의 지향점이 하늘이 되고, 추구하는 목표가 더불어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세상이 되었고, 가장 우선하는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것입니다(히브리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사회”에 적응(?)하다보니, 바뀌어진 기준, 그러니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서는 즐겁게, 평안하게, 안락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들과 다른, 더 나은 대우를 받아 마땅한 사람인데,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하란을, 다시 이집트를 힐끗힐끗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건대, 우리가 회복해야할 이스라엘은 “그들”이 아니라, “나”입니다.

✣ 이 글은 특정 교회와 선교 단체를 비방할 목적이 없으며, 한국 교회의 이스라엘 선교 문화를 조금이라도 뒤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것입니다. 저와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도 이 글을 반박하면서 본인들의 선교와 신학의 틀을 좀 더 든든히 세울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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