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왜, 어떻게 그리고 언제?
안식일에서 주일로: 왜, 어떻게, 그리고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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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aty, Lawrence T. "From Sabbath to Sunday: Why, How, and When?" Pages 255-268 in Partings: How Judaism and Christianity became two. Edited by Hershel Shanks. Washington D.C.: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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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성경의 계명(출애굽기 20장, 신명기 5장)에 따라 안식일을 지켜왔다. 예수도 유대인이었기에 같은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켰다(누가복음 4:16 참조). 그러나 예수를 따르며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이들의 대부분은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킨다. 이 페이퍼는 기독교인들이 왜,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일요일을 예배하는 날로 지키게 되었는가를 연구한다.
신약성경과 초기 기독교 시기_유대교의 분파로서의 기독교와 회당 예배
초기 교회의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유대교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사적 모임이 성전이나 회당 예배와 충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보완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파’(사도행전 24:5)로 알려져 있었으며, 유대교 내의 사두개파(사도행전 5:17)나 바리새파(사도행전 15:5, 26:5)와 유사하게 유대교의 틀 안에 있었다. C.W. 더그모어(Dugmore)는, 초기 4세기까지의 기독교 공예배와 기도 모임이 시간과 형식 양쪽에서 회당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입증했다.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 갈등
_메시아가 신(神)이라니!
점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신학적인 이유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유대-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전통의 정당한 계승자라 여겼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❶ 메시아의 신성을 믿는 것이 유일신 신앙에 대한 위협이며, ❷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는 불순종이고, ❸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기이한 주장이라 생각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갈등 속에서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 여정을 따라다니며 그의 사역을 방해하고 무력화시키려 했다(사도행전 13:50, 14:5, 14:19, 17:5, 17:13, 18:6, 18:13, 20:3, 21:27, 23:12, 24:1-9 등 참조). 바울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체포되어 고소당한 사건은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분리를 더욱 가속화했다.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처음에는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을 향해 있었으나, 이후 모든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확장되었다. 따라서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도 배타적인 전통적인 유대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_야브네 회의
약 62년에 순교한 야고보의 죽음은 유대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더욱 심해졌음을 보여주며, 68~70년 유대인의 로마에 대한 반란 때 기독교인들이 요단강 동편(트랜스요르단)으로 도피한 사건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사이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만들었다.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랍비들은 야브네(헬라어로 얌니아)에서 유대교를 랍비 중심 체제로 재편하였다(약 80~90년경). 그들은 매일 회당 예배에서 나사렛파 이단(기독교)을 색출하기 위한 "이교도를 향한 축복(저주)" בריכת המינים가 담긴 기도문을 도입하였다. 비록 유대교인들과 유대-기독교인들 사이에 갈등은 심화되었지만, 이것은 유대-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안식일에도 회당에서 예배를 하였다는 증거일 수 있다.
_바르 코흐바의 혁명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제2차 유대인의 반란(바르 코흐바의 혁명 135년)을 진압한 뒤 예루살렘을 로마의 이교도 식민지로서 앨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하드리누스 황제의 도시)로 고쳐부른 사건은 유대교와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바르 코흐바의 혁명 이후로 예루살렘에서의 제사와 제사장 제도가 완전히 중단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는 그 이후로 안식일 제사를 지킬 수 없었다. 브루스 메츠거(Bruce M. Metzger)에 따르면, 이 시대 이후 서방 기독교에서는 유대교 중의 하나로 오인받지 않기 위해 안식일 준수를 피하려는 경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방 기독교에서는 여전히 안식을 예배하는 날로 지켰고, 150년경의 저스틴(Justin Martyr)의 시대에도 유대-기독교인들은 안식일 준수를 매우 강조했다.
로마 제국의 반 유대주의의 영향
로마 제국 초기 기독교인과 유대인 간의 관계는 '흡수와 분리' '연속성과 단절'이 공존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예배 전통을 기독교 성격에 맞게 받아들이고 적응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유대교와는 구별된 존재로 인식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였기에 유대교의 전통에서 분리된 공동체라는 자기 인식도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자의식—즉 유대교와의 구별됨에 대한 인식—때문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로 기독교 내부에서든, 유대교와의 관계 속에서든 갈등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 내의 반유대주의적 분위기는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와 다른 정체성을 가지려는 데에 한 몫을 하였다. 유대인의 제1차 대로마 항쟁(66-70년)과 제2차 대로마항쟁(132-135년)은 로마 제국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유발하였다. 바로 이 시점(약 116~126년경, 로마 교회의 감독인 식스투스 Sixtus)에 로마에서 최초로 부활절 주일(Easter Sunday)가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의 유월절(니산월 14일)과는 달리, 항상 주일에 부활을 기념하려는 시도로, 유대교와의 분리를 명확히 하려는 의도가 담긴 조치였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정책(2세기 초)은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는데,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으로 분류되지 않기 위해 안식일과 유월절을 유대식으로 지키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4일파 논쟁
기독교인들이 유월절(니산월 14일)을 부활절로 지키는 전통의 시작은 1세기 후반부터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포스(약 69-155)의 시대부터 예루살렘과 소아시아(현재의 터키 서부) 지역에서 지켜졌다. 폴리카르포스는 자신의 관행이 "사도 요한과 함께 있던 다른 사도들"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로마에서는 로마 주교 식스투스 1세(Sixtus I, 116-126재임) 시대부터 부활절을 유대교 니산월이 있는 달의 특졍한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키자고 주장했다. 로마교회는 유대교의 달력에 의존하지 않고 매년 일요일에 축하함으로써 예배 일정의 일관성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유대교의 명절읠 따라 니산월 14일에 부활절을 지키자는 사람들을 14일파(Quartodeciman)라 불렀는데, 이들은 십자가 죽음에 초점을 맞춰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였다. 반면에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자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맞춰 승리와 생명의 의미를 강조하려고 하였다. 일요일을 지키려는 로마 교회는 대다수가 이방인 출신들이었고 유대교가 로마에서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교적 관습에서 벗어나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의 통일된 관행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처음 이 두 전통이 부딛쳤을 때(155년경, 폴리카르포스(스미르나 주교) vs 아니케투스(로마 주교))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성찬을 나누며 평화롭게 헤어졌다. 그러나 두번째로 충돌하였을 때(195년경, 폴리크라테스(에베소 주교) vs 빅토르(로마 주교)) 빅토르가 14일파를 이단으로 규정하하려고 시도했으나 다른 주교들(특히 이레니우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 325년) 부활절을 춘분 후 첫 번째 보름달 다음 첫 번째 일요일로 확정하고 모든 기독교회가 동일한 날에 부활절을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니케아 공의회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14일파에 대해 유대주의자라고 공격을 하였고 박해하였다.
결론적으로, 14일파 논쟁은 단순한 날짜 논쟁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서 사도적 전통의 해석, 교회의 권위, 유대교와의 관계, 그리고 동서방 교회의 독립성을 둘러싼 복합적인 신학적·정치적 갈등의 결과였다.
라오디게아 공의회(Council of Laodicea, 363-364년)
라오디케아 공의회에서 제정한 교회법 규칙 29조에서 안식일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규정을 명확히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에 쉬는 유대인 흉내를 내어서는 안 되며, 그 날에는 일을 해야 한다. 대신, 주님의 날(일요일)을 존귀히 여기며 가능한 한 그 날에는 쉬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유대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발견되면,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되어야 한다.”
그래서 4세기 교부들인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예루살렘의 키릴루스(Cyril), 카파도키아의 바실(Basil), 안티오키아의 크리소스톰(Chrysostom) 등은 모두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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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일요일을 주일로?_(1) 로마의 태양 숭배
반유대주의가 안식일을 거부하게 만들었다면, 왜 주일(일요일)이 선택되었을까?
그 가능성 중의 하나나는 고대 로마의 행성 주간 체계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로마 시대 일주일은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등 7개의 행성 이름을 딴 날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행성 주간 체계는 태양을 기준으로 두고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순서로 행성을 배열한 체계이다. 따라서 로마에서는 일곱 날들 중에서 일요일을 제일 우월한 날로 였으며 신성한 날로 삼았다.
초기 교부인 저스틴(Justin Martyr, 활동시기 130-165년)는 기독교 예배를 이교 태양 숭배의 상징과 연결함으로써, 로마 황제에게 기독교가 합당하고 우호적인 종교라는 인상을 주려 했다. 이것이 제일 처음 일요일과 주님의 날을 연결한 시도였지만, 그 이후로 이렇다할 기록들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다가 유세비우스(Eusebius, 약 260–340년)는 여러 문헌에서 빛, 태양, 태양의 날이라는 상징을 명확히 사용하며, 주일 예배를 유대인의 안식일을 대체하는 날로 정당화한다.
“로고스(말씀)는 새로운 언약을 통해 안식일의 기념을 빛의 떠오름, 곧 태양이 떠오르는 날로 옮기셨다. 우리는 6일 간의 간격 후에 이 빛의 날, 곧 첫째 날, 참된 태양의 날에 모여 영적 안식일을 지킨다. 안식일을 위해 규정되었던 모든 것을 우리는 이제 주님의 날로 옮겼다. 그 날은 더 권위 있고, 더 존귀하며, 유대인의 안식일보다 더 탁월한 날이다. 바로 이 날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더라’ 하셨으며, 우리의 영혼을 위해 의의 태양이 떠오른 날이기도 하다.”
(유세비우스, 시편 91편 주석 중에서)
그러므로 유세비우스의 때에 예수님을 빛과 태양과 연결짓는 유대-기독교 전통과, 이교 세계에서 태양을 숭배하던 상징들이 융합되며, 안식일을 대체할 새로운 날로서 일요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왜 일요일을 주일로?_(2) 유대교 전통
사해문서를 기록한 쿰란 공동체는 태양력을 사용하였다. 이에 착안하여 얼 힐게르트(Earle Hilger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일요일에 대한 심리적 성향은 쿰란이나 유사 집단들에서 기인했을 수 있으며, 이것이 초대 교회에서 일요일 준수가 정착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슷한 유대 전통은 『희년서(Jubilees)』에도 나타납니다. 이 책은 연간 절기들을 특정한 요일에 맞춰 배치하는 유대 종교력을 보여준다.
일요일 예배의 신학
기독교 예배를 위해 일요일을 선택하고 지키는 데는 여러 신학적 동기들이 제시되어 왔다.
대표적인 동기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예수님의 부활
2. 창조의 첫째 날로서의 상징성
3. 여덟 번째 날이라는 상징
_부활
예수는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유대식 셈법으로 셋째 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였다. 이 부활 사건은 곧 일요일을 예배의 날로 삼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되었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이 이 신학을 분명하게 말한다: “주일은 유대인에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선언된 날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활을 통해 드러났으며, 그 사건에서부터 이 날의 축제가 유래하였습니다.”
_창조
저스틴(Justin Martyr, 활동시기 130-165년)의 글에서도 부활은 일요일 예배의 중요한 동기이긴 하지만,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저스틴은 창조의 첫날, 즉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창조 사건을 더 근본적인 이유로 제시한다.
“우리는 주일에 함께 모입니다. 그날은 하나님께서 어둠과 원질을 변화시켜 세상을 창조하신 첫 번째 날이며, 또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스틴 마터, 『제1변증서』 67.5-7)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Alexandria, 약 500년경) 『주일에 대하여(De Die Dominico)』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며, 모든 날의 주이신 그분의 날입니다. 이 날에 주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의 기초를 세우셨고, 같은 날에 부활의 첫 열매를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우리에게 모든 은혜의 근원이 되며, 세상의 창조의 시작이요, 부활의 시작이며, 한 주간의 시작입니다. 이 날은 세 가지 시작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삼위일체(Trinity)**의 원리를 예표합니다.”
_"여덟 번째 날’이라는 상징
초기 기독교는 숫자의 상징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 점은 현대 독자들에게는 낯설지만 당시 설교자들에게는 매우 실용적이며 영적 의미가 풍부한 논거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Epistle of Barnabas, 활동 130-132년)는 『바나바서』에서 이사야 1:13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그들에게 또 말합니다. “너희의 초하루와 안식일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당신은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안식일들이 나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그 안식일, 곧 모든 것을 안식하게 한 후 시작하는 여덟째 날, 즉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이 되는 날이 나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도 기쁨으로 여덟째 날을 지킵니다. 이 날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며, 그가 자신을 나타내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서』 15.8-9)
바나바가 여덟 번째 날을 우주적-종말론적 상징으로 사용하여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한 논리는 이후 많은 교부들에 의해 반복되고 발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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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서 주일로: 왜, 어떻게, 그리고 언제?
언제. 기독교의 일요일에 대한 최초의 명시적이지만 조심스러운 언급은 『바나바서』 15장(130-132년) 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여덟 번째 날을 기쁨으로 보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이 날은 종말론적 안식일의 연장이자 부활의 기념일로 지켜졌다. 그러다가 라오디게아 공의회(363-364년)에서 교회법으로 규정되었다.
왜.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년) 치하에서 활동한 『바나바서』를 기록한 저자의 시대에는 유대인에 대한 억압이 매우 극심했다. 특히 안식일 준수는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종교적 유대 전통은 범죄로 간주되었다. 이런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정체성 재정립 욕구로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로마를 중심으로 이방인 출신 기독교대인들은 유대교와 단절 하였다. 유대인과 제국 간의 갈등 속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님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유대교와 동일시되는 관습인 안식일과 유월절이 배척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도 모세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강조하는 유대-기독교 공동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어떻게. 그 결과, 주로 이방인 출신으로 구성된 로마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적 의식인 유월절을 부활절로, 안식을을 일요일로 대체하였다. 그래서 로마는 기독교를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안식일을 폐지하고 일요일을 주일로 준수하게 된 것은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생존 전략이기도 하였다.
첨언. 반유대주의적 로마 사회에서 새로운 예배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당시 로마인들이 신성한 날로 지켰던 태양의 날(Sunday)은 하나님을 빛과 태양으로 상징하는 기독교 전통과 맞물려서 기독교인들이 태양의 날(일요일)에 거부감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리고 일요일은 이교도 세계에게도 낯설지 않은 상징성이 있었기에, 복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부활과 창조를 전하기에 적합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거부와 주일 준수는 단순한 시간의 전환이 아니라, 정체성·신학·전략의 변화를 모두 포함한 전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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