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성서를 기록하였는가? J와 E에 대한 간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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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
누가 성서를 기록하였는가? (Lecture I)
1. 모세의 단일 저작설에 대한 도전들
모세의 단일저작설에 대한 의문은 오경이라 불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서로 같은 소재를 다루는 이야기들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 때문에 시작되었다. 기원후 3세기 기독교 신학자인 오리겐이 모세 저작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벌써 1800년이 넘게 모세 단일저작설은 의심받았다. 유대교 내에서는 내용상의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미드라쉬와 같은 성서해석 방법론이 생겨나게 되었다.
11세기이븐 야슈스 Isacc i. Yashush창세기 36장에 등장하는 에돔 왕들의 목록은 모세보다 훨씬 이후에 살았던 왕들이다.
14세기 본필스 Bonfils 모세를 3인칭으로 서술한 구절들
15세기토스타투스 Tostatus모세의 죽음 이야기를 모세가 기록할 수 없다.
16세기판 마에스 Andreas van Maes모세가 기록한 본문에 후대의 기록자들이 확대하였다.
페레이라 Benedict Pereira, 봉프레르 Jacques Bonfrere
17세기 홉스 Thomas Hobbes (עד היום הזה), 페이레르 Isaac de la Peyrère (עבר ירדן)
스피노자 Spinoza (1) 모세에 대한 3인칭 서술, (2) 모세의 죽음보도, (3) "오늘까지"라는 표현, (4) 모세가 죽고 난 후에 생긴 지명에 대한 언급, (5) 모세 이후에 일어난 문제들의 처리 (예: 에돔 왕들의 목록) 등등.
18세기 시몬 Richard Simon성서의 저자들이 옛 자료에서 임의로 이야기를 모았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 아브라함 아들 이삭의 이름을 짓는 이야기, 아브라함이 이방 왕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 이삭의 아들 야곱이 메소포타미아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 야곱이 벧엘에서 받은 계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 바뀌는 이야기, 모세가 므리바라는 곳에서 바위를 쳐 물을 낸 이야기 등이 두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 시몬의 가설은 비터 (B. Witter) 아스트룩 (Jean Astruc), 아히호른 (J.G. Eichhorn)에 의해서 두자료설 (J, E)로 발전되었다.
2. 두 자료설 (J, E)에서 네 자료설 (J, E, D, P)
성서에는 반복되는 두개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삼중적으로 반복되는 이야기도 여럿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경에서 또 다른 자료를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세 자료). 그리고 드 베데 W.M.L De Wette는 신명기가 그보다 앞서 있는 네 권의 책과는 언어상으로 큰 차이가 있고, 세 개의 옛 자료 문서 중에서 어느 것도 신명기와의 연속성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네 자료설을 주장했다.
3. 성서를 산출한 첫번째 세계
이스라엘 공동체는 각 지파별 독립성이 보장된 사회였다. 지파별 독립성은 단지 정치나, 경제적인 면 뿐 아니라, 종교적인 독특성까지도 모두 아우른 것이다. 이같은 특징은 통일 왕국 시대에도 여전히 있었다. 이것은 특징이면서 동시에 갈등의 불씨이기도 했다. 솔로몬의 때에는 유다에 속해 있는 솔로몬이 북쪽의 지파 사람들을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으로 차별하였고, 북쪽 지파들의 지파 체계 구조를 허물어 뜨리려고 하였다. 이런 이유들로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으나, 왕국이 정치적으로 둘로 부열된 것은 종교적으로도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새로운 왕국은 자기 버전 Version의 종교적인 체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 성서를 산출한 세계는 바로 두 왕국이 분열되고, 북왕국이 멸망하기 까지의 약 200여년의 시기였다.
J, E 자료간의 내용비교 (1)
1. 모세의 단일 저작설에 대한 도전들
모세의 단일저작설에 대한 의문은 오경이라 불리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서로 같은 소재를 다루는 이야기들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 때문에 시작되었다. 기원후 3세기 기독교 신학자인 오리겐이 모세 저작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벌써 1800년이 넘게 모세 단일저작설은 의심받았다. 유대교 내에서는 내용상의 불일치를 극복하기 위해서 미드라쉬와 같은 성서해석 방법론이 생겨나게 되었다.
* 학문적으로 모세의 단일 저작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던 사람들
11세기이븐 야슈스 Isacc i. Yashush창세기 36장에 등장하는 에돔 왕들의 목록은 모세보다 훨씬 이후에 살았던 왕들이다.
14세기 본필스 Bonfils 모세를 3인칭으로 서술한 구절들
15세기토스타투스 Tostatus모세의 죽음 이야기를 모세가 기록할 수 없다.
* 모세의 저작설을 인정하면서도 후대 편집자들이 몇몇 단어나 문구를 삽입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
16세기판 마에스 Andreas van Maes모세가 기록한 본문에 후대의 기록자들이 확대하였다.
페레이라 Benedict Pereira, 봉프레르 Jacques Bonfrere
* 오경의 대부분은 모세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들
17세기 홉스 Thomas Hobbes (עד היום הזה), 페이레르 Isaac de la Peyrère (עבר ירדן)
스피노자 Spinoza (1) 모세에 대한 3인칭 서술, (2) 모세의 죽음보도, (3) "오늘까지"라는 표현, (4) 모세가 죽고 난 후에 생긴 지명에 대한 언급, (5) 모세 이후에 일어난 문제들의 처리 (예: 에돔 왕들의 목록) 등등.
18세기 시몬 Richard Simon성서의 저자들이 옛 자료에서 임의로 이야기를 모았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 아브라함 아들 이삭의 이름을 짓는 이야기, 아브라함이 이방 왕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 이삭의 아들 야곱이 메소포타미아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 야곱이 벧엘에서 받은 계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 바뀌는 이야기, 모세가 므리바라는 곳에서 바위를 쳐 물을 낸 이야기 등이 두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 시몬의 가설은 비터 (B. Witter) 아스트룩 (Jean Astruc), 아히호른 (J.G. Eichhorn)에 의해서 두자료설 (J, E)로 발전되었다.
2. 두 자료설 (J, E)에서 네 자료설 (J, E, D, P)
성서에는 반복되는 두개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삼중적으로 반복되는 이야기도 여럿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경에서 또 다른 자료를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세 자료). 그리고 드 베데 W.M.L De Wette는 신명기가 그보다 앞서 있는 네 권의 책과는 언어상으로 큰 차이가 있고, 세 개의 옛 자료 문서 중에서 어느 것도 신명기와의 연속성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네 자료설을 주장했다.
3. 성서를 산출한 첫번째 세계
이스라엘 공동체는 각 지파별 독립성이 보장된 사회였다. 지파별 독립성은 단지 정치나, 경제적인 면 뿐 아니라, 종교적인 독특성까지도 모두 아우른 것이다. 이같은 특징은 통일 왕국 시대에도 여전히 있었다. 이것은 특징이면서 동시에 갈등의 불씨이기도 했다. 솔로몬의 때에는 유다에 속해 있는 솔로몬이 북쪽의 지파 사람들을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으로 차별하였고, 북쪽 지파들의 지파 체계 구조를 허물어 뜨리려고 하였다. 이런 이유들로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으나, 왕국이 정치적으로 둘로 부열된 것은 종교적으로도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새로운 왕국은 자기 버전 Version의 종교적인 체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 성서를 산출한 세계는 바로 두 왕국이 분열되고, 북왕국이 멸망하기 까지의 약 200여년의 시기였다.
J, E 자료간의 내용비교 (1)
J | E | |
세겜 획득 과정 | 대량학살 | 하몰로부터 구입 |
장자 상속권 | 유다가 장자 상속권을 받음 | 요셉의 두 아들들이 두 배의 유산을 받음 |
모세의 후계자 | 백성에게 용기를 붇돋아 준 이는 갈렙 | 모세의 조력자는 여호수아 |
공동체의 지도자 | 아론 중심 (사독) | 모세 중심 |
십계명 | 돌판을 깬다. | |
신앙생활 | 법궤중심 | 회막중심 |
누가 성서를 기록하였는가? J와 E 자료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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