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1] 시작하는 이야기
holinesscode
2019-09-16
이 글은 2019년 봄 성서학연구소 BIBLIA가 미래목회연구소 느헤미야와 함께 진행한 "사사기-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동영상 강의는 갓피플TV에서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정리는 강의를 읽기 쉽도록 정리하였고, 중간 중간 혹 정확한 정보의 전달을 위해서 내용이 삽입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혹 강의를 하다가 실수한 부분은 교정을 하였습니다.
❖ 사사기는 사사들이 주인공일까?
(사사기의 구조) 책의 이름 자체가 "사사기"이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사사들의 이야기가 "사사기"의 중요한 관심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사들이 살았던 삶의 이야기가 "사사기"라는 책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좋은 소재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체 책 "사사기"를 보세요. 이 긴 책에서 사사 개인의 삶을 기록한 이야기들은 3장부터 16장까지입니다 (삿 3:7-16:31). 그럼 나머지 1-2장은요? 그리고 17-21장은요? 사사기 전체가 스물 한개 장(章)인데, 그 중에서 일곱 개 장(章)이 사사들의 일화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정확하게 2/3는 사사들의 이야기, 그리고 1/3은 사사들이 아닌 다른 이야기들로 짜여진 책이 사사기입니다.
저는 이런 형태를 "보따리 형태"라고 부르고 싶어요. 3장부터 16장까지의 사사들의 이야기를 보따리로 싸서 묶은 것이 사사기라는 거지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사사들과 함께 살면서 마치 전기문(傳記文)처럼 기록한 책이 "사사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던 사사들에 대한 기억과 기록들을 오늘날 우리들이 읽는 성경과 같이 두루마리 하나로 엮어서 기록한 것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라는 두루마리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그러니까 이 두루마리를 기록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겁니다. 그 이유와 목적을 바탕으로 사사들의 이야기를 구성했겠지요? 사사들의 이야기 보따리를 꾸릴 때, 사사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담을 텐데, 사사들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보따리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감,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읽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에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 사사기가 예언서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타낙"(תנ"ך)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을 구분할 때, (1) 율법서, (2) 예언서, (3) 성문서, 이렇게 세가지 분류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율법서를 '토라'(תורה)라고 하고, 예언서를 '네비임'(נביאים), 성문서를 '케투빔'(כתובים)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세 분류의 히브리어 첫 글자들을 모아서 만든 단어가 "타낙" 입니다.
이렇게 나누다보니, 좀 의아한 것이 있습니다. 사사기는 누가 읽어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벌어진 전쟁과 사건들을 나열한 역사 기록"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경 분류에 따르면 예언서(전기예언서)에 속한다는 거지요. 그러고보니, 전기 예언서에 들어가는 책들이 다 이상해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모두 예언서라니 말입니다.
❖ '예언'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역사를 바라보는 유대인의 시각입니다. 우리는 "역사" 하면, 과거에 일어났던 이야기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역사 이야기를 과거에 일어났던 옛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의 역사 이야기가 우리의 미래를 보여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언' 하면, 대개 "무슨일이 앞으로 벌어질까?" 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요, "내가 네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히 이런 일을 당하겠구만. 운명은 피할 수 없어. 이미 신(神)이 정해 놓은 것이니까. 그래도 꼭 그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액땜한다손 치고 이렇게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을 말하는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부르지 않아요. 이런 사람들을 '무당'과 '박수'라고 불렀지요. 율법에 의하면 이렇게 운명적인 미래를 점치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사형에 처해야 되는 사람들로 분류해 놓았습니다(출 22:18; 신 18:9-12).
그러면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이 하는 일들은 무엇이었을까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율법의 교사이자 일종의 역사가들이었습니다. 조금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볼께요. 사람들이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이런 모양이거든요. 그런데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이미 예전에 우리 선조들이 한번쯤 다 해보았던 것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던 과거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옛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우리 선조들이 과거 바알브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세요. 광야에서 했었던 일을 생각해보세요. 잘 알다시피, 우리 선조들은 이러이러했잖아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이렇게 했잖아요. 그래서 그들이 요렇게 된 것 다 알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요?"
만약 잘못된 길을 걸었던 조상들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그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들을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선조들이 걸었던 그릇된 길을 그대로 따라 걷고 있다면, 예언자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여러분들의 현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벌을 받았던 우리 선조들과 별다를 바 없지요? 똑같지요? 심지어는 그보다 더 어긋나 있지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옛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되었지요? 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구나! 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고생 고생하다가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었구나.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 것같아요? 하나님의 기준은 바뀌지 않을테니... 여러분도 옳지 않은 길을 걸었던 우리 선조들과 별다를 바 없는 미래를 맞이하겠군요."
구약 시대의 예언자는 과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율법)과 그 말씀을 받고 이 땅에서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삶, 그리고 그 삶의 열매를 배우고, 그 역사를 기준 삼아 하나님의 영으로 오늘을 비평하고, 내일 우리가 걸어가야할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예언자는 과거를 배워 오늘을 비평하고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누가 참 예언자인가, 그리고 누가 거짓 예언자인가?" 구약 성경에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참 예언자라고 한다면, 그 예언자가 한 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참 예언자라고 생각합니다. 큰 틀에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며,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신 18:22)
그런데, 이것 만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기준이라면, 구약 성경에는 거짓 예언자의 글이 떡허니 있는 셈이 됩니다. 요나(Jonah)요. 니느웨가 40일 뒤에 멸망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욘 3:4)은 틀렸습니다. 요나가 예언을 하자, 니느웨 왕과 대신,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회개를 하였거든요.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는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예언자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서 거짓 예언자로 만든 셈이지요. 예레미야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또 다른 기준을 말합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렘 28:9)
이 구절을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예언자가 평화를 예언할 때는 그 평화가 이루어져야만 참 예언자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예언자가 "걱정마. 잘될꺼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길에 있지 않으니, 네가 걸어가는 길에서 돌이키라. 돌이키지 않으면 너희가 이러 이러하게 되리라." 라고 예언을 했는데, 그 사람이 그 예언을 듣고, 돌이켜서 예언자가 말했던 그 미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예언 성취의 여부와 관련없이 그는 참 예언자이다."
❖ 예언자의 역할, 역사의 역할, 그리고 사사의 역할
예언자의 역할은 피할 수 없는 미래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율법을 기억하고 읽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내고, 지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영으로 오늘을 날카롭게 비평하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비추어 잘한 일에는 칭찬하고 축복하고, 과거에 그릇된 길을 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길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이 잊고 있었던 과거(율법)를 다시 기억하게 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었다면, 예언자의 격려로 더 큰 힘을 얻고,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예전처럼 지금 이 길을 쭉 걸어가면 되는 것이죠.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면, 예언자의 경고에 정신 차리고 지금 걷는 길에서 돌아서면 됩니다. 격려를 듣고 그대로 걷다가 하나님의 복을 얻으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한 그가 참 예언자가 되는 겁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결국 하나님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질책을 듣고 그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면, "결국 하나님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예언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품은 예언자"로 인정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의 가장 큰 사명을 사람들의 미래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게하는 촉매제는 과거의 역사이며 율법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언은 곧 "역사를 되짚어 보면, 내 미래를 직시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같네요.
이스라엘 역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사사기를 읽으면서 "아, 사사 시대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하나님을 그토록 쉽게 잊을 수가 있는거야?"라며 분노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 사람들이 살았던 그 때의 삶을 날카롭게 비판하되, 현재 나의 삶을 직시하고 비교하면서, 나는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늘 마음에 품고 사사기를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앞 날이 어떨지가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 사사기는 예언서입니다.
그러면, 역사이자 예언서인 사사기 두루마리에서 소개하는 사사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사기를 영어로는 The Book of Judges 라고 합니다. "사사"라는 어려운 말로 번역해 놓기는 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재판관"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카톨릭 교인들이 읽는 성경에서는 이 책을 "판관기"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사들이 재판을 하던 사람들이었나요? 물론 드보라처럼 재판하는 일을 했던 사사들도 있습니다만, 그에 못지 않게 전쟁 지휘관의 이미지가 더 빨리 떠오르기도 합니다. 사사치고 전쟁 한번쯤은 치루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거든요. 물론 전쟁을 치루지 않은 사사도 있지만 말이죠. 사사들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재판관", "군사 지휘관"이라는 이미지가 모든 사사들의 특징과 역할을 모두 아우른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의 최종 책임자"(Decision maker)라는 말이 제일 적합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민족이 곤경에 처했을 때,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결정을 수행해야했던 사람. 그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 중에 가장 앞에 나서야했던 사람이 바로 사사라는 말입니다.
❖ 사사기가 순환구조라고?
사사들의 이야기를 묶어낸 "사사기"를 공부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사사기가 순환구조(Cyclical framework)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또 교회에서도 사사기를 공부할 때 그렇게들 말합니다. 순환구조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1]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어요. 가나안 땅에 정착하며 살다보니 삶이 조금씩 좋아지거든요. [2] 경제적인 측면에서 삶의 질이 좋아지다보니, 여유도 생겨요. 그러다보니 슬슬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길로부터 멀어져 가지요. [3] 결국은 고난을 당합니다. [4] 그러고나면, 그제서야 하나님께 울부짖어요. [5] 그러면 참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사사를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사사가 이스라엘을 구원해요. [1] 다시 평화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그 다음부터는 [2]-[3]-[4]-[5]-[1]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순환 구조라고 부릅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사기의 큰 맥은 그 순환구조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두명의 사사 중에서 그 순환구조를 갖고 있는, 스토리를 갖고 있는 이야기는 다섯명 밖에 없고요,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순환구조를 갖고 있는 사람은, 옷니엘 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머지는 사사들의 이야기는 순환구조라는 틀 안에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억지로 끼워입은 옷처럼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사사기의 순환구조는 사사기에서 소개하는 사사들의 삶,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그 사사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군상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순환구조가 사사기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전체 사사 이야기들의 절반에도 해당하지 않는 구조이니까요.
앞서서 "사사기"라는 책이 "보따리 형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사들의 이야기를 묶어내는 보따리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이라고도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감,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읽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에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사사기 1장부터 3장까지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왜 사사기를 기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소개하는 도입부이구요. 17장부터 21장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정말로 고발하고 싶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현주소를 농축해 놓은 총정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은, 중간에 끼어있는 사사들의 이야기들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강력한 메세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례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 사사기 1-2장
사사기 1장과 2장은 시간의 순서로 보았을 때, 여호수아 23, 24장과 서로 포개어집니다. 시간 순으로 역사를 나열한다 손쳤을 때, 사사기 1장과 2장은 여호수아서 쪽에 들어가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내용을 볼까요? 여호수아가 23장부터해서 마지막 고별 연설하시고 돌아가시거든요. 그런데 사사기 보면은요, 사사들의 시대의 첫 출발을 알리는 과정에서 아직 여호수아가 죽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사기 2장에 가야지 여호수아가 죽습니다. 그럼 왜 이리 모호하게 여호수아서의 뒷 부분과 사사기의 앞 두분이 겹쳐지게 기록했을까요? 아마, 이 두개의 책이 나뉘어진 책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책으로 연결시켜 함께 보아야 할 역사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지 않을까요? 그럼,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앞의 두루마리인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포개 놓으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첫번째,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려고
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삿 2:2-3)
신명기 20장 10절부터 14절에는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할 전쟁 규정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1] 먼저는 무력이 아니라 항복할 것을 권유합니다. [2] 권유를 따라 항복하면, 서로 화평을 이루고 성문을 연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2-1] 그러나 항복하지 않으면 본격적으로 전쟁을 하는데, 성 안의 남자들을 다 죽이는 겁니다. [3] 전쟁 중에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그냥 탈취물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 기준을 주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 전쟁에는 전혀 다른 전쟁 명령을 내리십니다. 히브리어로는 "헤렘"חרם이라고 부르는 "진멸"시키는 전쟁입니다. 남여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그리고 그 성읍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거예요.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이것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성인 남자들을 제외한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모든 가축들과 재산들은 "전리품"이예요.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에서 얻게 되는 전리품이 전쟁 최대의 관심사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멸"을 말씀하시는 것은 전쟁에서 얻게될 개인의 "전리품"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실 그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사람의 욕심이 그런가요? 성경에서는 아간으로 대표되는 한 인물의 사리사욕을 소개하고 있지만(수7),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옆구리에 가시를 하나 박아 두었습니다. 손바닥에 박힌 아주 작은 가시 하나가 그리 아프지 않지만, 갑자기 무언가를 만질 때나, 살짝 스칠 때, 따끔거리면서 그것에 주목하게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가시처럼 박아 두어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땅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말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두번째, 현실점검을 위해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삿 2:20-23)
사사기 역사가가 말하는 두번째 대답 "현실점검"입니다.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 땅의 사람들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라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시험"이라는 모티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이스라엘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의 현주소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아실겁니다(출 16).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서 이스라엘의 진 주위에 있게하고 먹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출 16:4).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해 보고 싶으셨던 거지요.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 이미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만나 뜨러 나간 사람들 있었습니다. 만나를 주시는 은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시험하시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꾸짖으셨습니다(출 16:28-30).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이유는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 나락으로 떨어뜨려서 어떻게든 벌을 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의 목적은 현실 점검입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걸음 걸음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의 목소리를 잘 들으며 옳은 길로 제대로 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사사기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도(하나님의 율법)를 잘 지키나 그렇지 않나현실 점검을 하기 위해서 가나안 사람들을 남겨두었다."라는 거에요. 그게 그 땅의 사람들을 남겨두신 두번째 이유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세번째, 역사를 알게 하려고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삿 3:2)
출애굽하고 광야에 40년을 보냈습니다. 이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는 잘 아실 거예요. 민수기에서는 출애굽 1세대와 2세대의 교체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출애굽 1세대가 없었다고 하니(민 14:30) 아마 여호수아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출애굽 1세대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출애굽 2세대, 출애굽 3세대가 섞여 살던 시대였을 겁니다. 출애굽 3세대는 모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보았다손 치더라도 아주 어린 나이에 잠깐 스치듯 보았을까요? 이들은 선조들이 광야에서 아말렉 사람들과 싸우고, 모압사람들과 싸우던 이야기를 선조들의 입을 통해서 옛날 이야기 듣듯이 들으며 자랐던 사람들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아예 이런 이야기 조차도 몰랐던 사람들도 있었던 같아요(참조. 사사 입다 이야기).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눈에 "전쟁의 이야기"는 곧 "역사"였습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쟁을 알게 한다는 것은, 지금 이들을 모두 전쟁 용사로 키우겠다는 말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역사를 알게 하겠다"는 말로 이해하면 훨씬 더 자연스러울 것같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잊지 말아야할 또 다른 전쟁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니, 이 역사가 제일 중요한 역사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사기 3장 2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이라며, 그 땅에 남겨진 민족들의 명단을 나열하고는 그 이방 민족과의 결혼 이야기를 하지요. 성경을 통틀어 가장 예민한 가정 문제가 이방인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큰 곤혹을 겪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 25:1-3)
이방인들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오늘날 국제 결혼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민수기의 예와 같이 간단하게 가정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광야의 생활을 하며 안정적이지 않은 생활을 하던 출애굽한 사람들이 한 땅에서 정착하면서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으니, 그들과 결혼을 한다면 그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십수년을 떠돌이 생활하던 출애굽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매우 매력적인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통과의례가 있습니다.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종해야할 의무 뿐 아니라, 그들의 일원이 되어 그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모압 여인들과 함께 모압의 신들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간 거예요. 안정적인 삶과 신앙을 바꾼 것이지요. 뭐,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이 좋은 것을 왜 버려? 우리가 잘 취했다가 하나님께 드리면 되지. 아니 그 사람들이 이룬 선진 문화를 왜 죽이면서까지 없애? 잘 가다듬어진 문화를 흡수해서 우리 문화를 성장 시키면 되지". 이렇게, 이방 문화와 타협했던 사람들, 그리고 "아니다. 우리는 조금 늦게 가더라도 하나님의 정체성을 지켜야 겠다."는 사람들이 성경에서는 늘 싸우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싸우고 있지요. 타협했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우상 숭배의 길로 가고, 타협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계속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거지요.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5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민 25:4-5)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의 눈에는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는 것은 "정체성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 향한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전쟁 말입니다. 를 너머서 물질 문명의 화려함은 늘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만나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즐기고 있는 물질 문명이 좋아보이고, 그들이 누리는 문화가 더 나아 보였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가나안의 것들을 선택하던 시대가 사사들의 시대입니다.
첨부파일
댓글 작성은 로그인 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