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IA 레위기 성경공부 시리즈 (1) 레위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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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
기원전 458년, 아닥사스다 왕(아르타크세르크세스, Artaxerxes I)이 즉위한 지 7년째 되던 해, 아닥사스다는 에스라가 유다로 돌아가도록 허락했습니다. 아닥사스다가 에스라와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한 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지요.
아닥사스다의 아버지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Xerxes I, 486-465 BCE)였습니다.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이자 동시에 제2차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의 패배자이지요. 패배한 왕 아하수에로에 대해 불만을 가진 신하 아르타바누스(Artabanus)가 아하수에로를 암살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우스가 아버지를 죽였노라고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아르타바누스는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은 아들 둘 사이를 이간질해서 둘 모두를 죽이고 자기가 왕권을 잡을 욕심이 있었던 거지요. 아하수에로는 아르타바누스의 말을 믿고, 형제인 다리우스를 죽였습니다. 아르타바누스는 다리우스가 죽자 곧 아닥사스다를 죽일 음모를 꾸몄는데요. 이것이 발각되고 맙니다. 결국은 아닥사스다가 아르타바누스를 죽이고 왕위를 세워갑니다.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우니 페르시아 제국의 변방에서 호시탐탐 독립을 꿈꾸던 나라들이 가만 있을리가 없겠지요. 혼란을 틈타서 페르시아 제국에 강제로 병합되었던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요. 그 대표적인 나라가 이집트였습니다. 아닥사스다가 왕이 된 후 10년 동안이나 이집트의 반란이 산발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기원전 459년이 되면, 이집트의 비옥한 델타 지역 모두를 이집트인들이 손에 넣고 페르시아 세력을 이집트 본토 땅 밖으로 밀어냅니다.
아닥사스다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만약 이집트가 더 세력을 키워서 페르시아 방향으로 영토를 계속해서 넓히기라도 한다면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이 지역을 성경에는 '아바르 나하라' עֲבַר נַהֲרָא Beyond-the-River 라고 불렀음)에 아닥사스다의 편에서는 믿을 만한 페르시아 사람 에스라를 보내기로 합니다.
아닥사스다가 그런 마음으로 에스라를 유다 땅으로 보냈을지라도 하나님은 이 때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때로 바꾸어 사용하셨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에스라가 유다 사람들의 영혼에 페르시아의 피를 수혈할 적격자로 여겼습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의 눈에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페르시아식 교육을 받은 유다에 뿌리를 둔 페르시아인일 뿐이었거든요. 적어도 아닥사스다에게는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표는 달랐습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16대 자손인 제사장이자 율법에 능통한 학자로 유다 땅으로 돌아가 성전 건축 이후 틀에 박힌 신앙생활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유다를 새롭게할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가 레위 사람들을 찾다
에스라는 아하와(אַהֲוָא) 강가로 유다로 돌아갈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남자만 1,499명, 아마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어림잡아 5,000명은 넘을 만한 수의 사람들이 아하와 강가로 모여들었습니다. 아닥사스다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했겠지요. 에스라의 시대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인원이 대략 4,500명으로 어림잡습니다. 그것도 느헤미야 때 성벽을 쌓고 난 이후(445 BCE)에 예루살렘에 정착한 사람들의 수이니, 그보다도 대략 13년 이전인 에스라의 시대는 예루살렘 인구가 그 보다도 훨씬 모자라는 수일 수 있겠습니다. 한 도시의 수보다 더 많은 인구가 페르시아에서 유프라테스 강 너머 유다로 움직였다? 아닥사스다는 유다 지역 뿐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의 땅들에 페르시아의 바람을 일으킬 만한 충분한 수였겠지요. 그러나 에스라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꼭 와야할 사람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레위 사람들, 그들이 없었습니다!
에스라는 유다로 돌아갈 사람들 가운데 엘리에셀과 아리엘, 스마야, 엘라단, 야립, 엘라단, 나단, 스가랴, 므술람을 가시뱌 지방으로 보냈습니다. 레위인들을 부르려고 말이지요. 아하와 강도, 가시뱌 지방도 현재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에스라서에서 가시뱌 지방은 유대인 공동체가 살던 지역으로 레위인들과 성전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대표들은 가시뱌 지방의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인 잇도에게 가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섬길 레위인들과 성전 일꾼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38명의 레위인들과 120명의 성전 일꾼들이 에스라가 기다리는 아하와 강가로 갔고, 에스라는 그들을 귀환 행렬에 동참시켰습니다. 그러면, 왜 애초부터 이 사람들은 에스라의 귀환 행렬에 함께하지 않았을까요? 또 왜 이 레위 사람들의 가문은 80년 전(538 BCE) 스룹바벨이 유다도 돌아갈 사람들을 불렀을 때 함께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손가락을 자른 사람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시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137편의 미드라쉬에서 4절과 5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유다를 멸망시키고 유다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총 세번에 걸쳐서 끌고간 포로의 수가 4,600명입니다. 시편 137편을 보니, 바벨론 사람들은 포로로 끌고간 유다 백성들 가운데 노래하는 레위인들을 자기의 잔치 자리에서 구경거리 삼아 노래를 시켰나봐요. 이 때 레위인들의 마음은 그야 말로 억장이 무너졌겠지요. 레위인들이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거룩한 노래를 바벨론 사람들의 잔치 자리에서 단지 그들의 흥을 돋우어주기 위해서 불러야했던 레위인들은 매우 수치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자기들의 엄지 손가락을 자르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손가락을 자르고 나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고 불렀지만, 가서 할 것이 없는 거지요.
레위기는 제사장이 지켜야할 규례들을 말하는데, 그 율법에 따르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손가락을 자른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손 치더라도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동료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리며 수고한 대가를 나누어 받는 참 미안한 처지에 놓이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가시뱌 지방의 레위인들은 그 땅에 남기로 했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선조의 신앙의 절개를 따라 지켜가고 있는 그 후손들도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며 가시뱌에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유대교 랍비들이 소개하는 시편 미드라쉬이며, 에스라가 불렀던 가시뱌 땅의 레위인들이 이야기입니다.
누가 과연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그럼, 왜 에스라는 콕 찝어서 가시뱌 지방의 레위인들을 불러냈을까요? 이 대답은 '상상력'이 동원되어야할 겁니다. 성경에는 이 질문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하고 있지 않거든요. 그리고 가시뱌 지방에 살았던 레위인들의 미드라쉬는 이 상상력에 기름을 붓습니다.
에스라의 때, 이미 1,600km 너머의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고레스 칙령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간 유다 사람들이 515년에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로 귀환 초창기에 못다한 성전을 짓고 제사장 예수아의 가르침을 따라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완공되고도 60년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예루살렘의 유다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선조들이 품었던 뜨거운 열정은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고, 틀에 박힌 신앙의 습관을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이 들려온거지요. 정치적으로는 아닥사스다의 최측근이자, 신앙의 계보로는 대제사장 아론의 자손이었던 에스라는 아닥사스다가 유다로 자신을 보내는 이 때가 흐트러진 예배, 형식은 남아 있으나 예배자는 없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그 곳에서 예배드리는 유다 사람들을 부끄럽게하려고 가시뱌 지방의 레위인들을 불러 모은 것이지요. 함께 가자! 주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는 모세의 때로부터 지켜온 율법 안내서를 따라 기계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기의 손가락을 으스러뜨리는 고통과 성전에서 일할 수 없는 불이익을 감내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가시뱌 지방의 레위인들이여, 당신들이야 말로 진정한 예배자요 제사장이다!
가리개에 덮여 숨겨진 13년
그런데, 에스라의 행적 중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기간이 있습니다. 에스라가 돌아온 458년과 느헤미야가 돌아온 445년 사이의 공백입니다. 느헤미야 8장에 따르면 느헤미야가 돌아온 뒤 에스라는 유다 백성들을 모으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읽습니다. 에스라가 돌아온 것은 그 보다도 13년 전인데, 왜 갑자기 에스라는 귀환 13년 만에 율법책을 읽었을까요? 느헤미야가 오기 전까지 에스라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였을까요?
근대의 학문적인 성경연구 방법이 소개되기 이전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이 기간이 에스라가 다섯 권의 율법 두루마리들(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하나로 엮는 시기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흔히들 '오경'(다섯 경전, Pentateuch), 또는 '율법서'(The Book of the Law)라고 불리는 성경이 '책'(코덱스 codex)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0년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성경은 여전히 두루마리였습니다. 그럼 에스라의 시대에 '창세기'라는 두루마리, '출애굽기'라는 두루마리, '레위기'라는 두루마리, '민수기'라는 두루마리, '신명기'라는 두루마리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첫장 첫절부터 끝장 끝절까지 일목요연한 형태로 있었을까요? 히브리어 구약성경 본문의 어투, 문장 구조, 어휘 등을 연구하면 꼭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때로는 돌판에, 때로는 점토판에, 때로는 두루마리에, 때로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스라엘의 역사,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 이야기들이 독립적으로 있었다고 설명하지요. 이와 같은 근대 성경연구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전통적인 에스라의 율법 낭독 사건 이해를 근거로 "에스라의 시대에 이르러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오경이 각각의 두루마리로 최종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기록의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에스라에게 '레위기'(레위기 두루마리의 원래 이름은 '봐이크라'이다.)라는 두루마리를 한데 엮어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앞서 설명했던 페르시아로부터 귀환하는 역사 이야기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귀환하는 이들은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위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페르시아 땅에서 일구어온 재산들의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에스라는 성전에 바친 예물을 믿음직한 제사장 열둘에게 맏겼습니다. 그들은 귀환 공동체를 대표하는 제사장이었고, 그 이름으로 보아서(참조. 스 8:18, 24)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손가락을 으스러뜨리는 고통을 감내하였던 기개넘치는 레위인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온 유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면서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수송아지 12마리, 수양 96마리, 어린 양 77마리, 그리고 속죄의 숫염소 12마리를 번제로 드리면서 그들의 심장은 감격으로 고동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땅에 도착하여 살던 사람들을 둘러보니, 페르시아에서 듣던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그들의 예배와 삶은 끔찍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배드림의 감격'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저 관성적으로 성전의 마당을 오갈 뿐이었지요. 그리고 마치 사사 시대의 선조들처럼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어긴채, 가나안의 여인들과 결혼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지가 오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는 유다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고, 예배를 예배답게 세워야하겠다고 마음 먹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손가락을 으스러뜨리며 '레위인'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나갔던 가시뱌 지방의 레위인 제사장들을 거울 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마음 가짐과 성전과 삶에서의 태도를 가르치고자 흩어져있었던 '제사장 지침'을 모으게 하셨습니다(유대교 랍비들은 '레위기'를 '제사장들의 지침서' 토라트 코하님 תורת כהנים 라고 부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룩한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하나님 백성의 삶의 지침'들을 모으게 하셨던 거지요(레위기 17장 이후를 '성결법전' the Holinesscode 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가르침들을 하나의 두루마리로 엮어 '바이크라'(레위기 두루마리의 히브리어 이름)라 불렀던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에스라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레위기를 읽으면 레위기는 딱딱하고 지루한 메뉴얼이 아니라, 당대의 유대인들과 그들과 별다름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계속 메아리칩니다.
기원전 458년, 아닥사스다 왕(아르타크세르크세스, Artaxerxes I)이 즉위한 지 7년째 되던 해, 아닥사스다는 에스라가 유다로 돌아가도록 허락했습니다. 아닥사스다가 에스라와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한 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지요.
아닥사스다의 아버지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Xerxes I, 486-465 BCE)였습니다.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이자 동시에 제2차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의 패배자이지요. 패배한 왕 아하수에로에 대해 불만을 가진 신하 아르타바누스(Artabanus)가 아하수에로를 암살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우스가 아버지를 죽였노라고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아르타바누스는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은 아들 둘 사이를 이간질해서 둘 모두를 죽이고 자기가 왕권을 잡을 욕심이 있었던 거지요. 아하수에로는 아르타바누스의 말을 믿고, 형제인 다리우스를 죽였습니다. 아르타바누스는 다리우스가 죽자 곧 아닥사스다를 죽일 음모를 꾸몄는데요. 이것이 발각되고 맙니다. 결국은 아닥사스다가 아르타바누스를 죽이고 왕위를 세워갑니다.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우니 페르시아 제국의 변방에서 호시탐탐 독립을 꿈꾸던 나라들이 가만 있을리가 없겠지요. 혼란을 틈타서 페르시아 제국에 강제로 병합되었던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요. 그 대표적인 나라가 이집트였습니다. 아닥사스다가 왕이 된 후 10년 동안이나 이집트의 반란이 산발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기원전 459년이 되면, 이집트의 비옥한 델타 지역 모두를 이집트인들이 손에 넣고 페르시아 세력을 이집트 본토 땅 밖으로 밀어냅니다.
아닥사스다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만약 이집트가 더 세력을 키워서 페르시아 방향으로 영토를 계속해서 넓히기라도 한다면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 지역(이 지역을 성경에는 '아바르 나하라' עֲבַר נַהֲרָא Beyond-the-River 라고 불렀음)에 아닥사스다의 편에서는 믿을 만한 페르시아 사람 에스라를 보내기로 합니다.
"12 왕 중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통달한 학자 에스라 제사장에게 칙령을 내린다. 13 나의 지시는 다음과 같다.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그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은, 제사장이든지 레위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가도 좋다. 14 나와 나의 일곱 보좌관이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그대가 잘 아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아라... 20 그대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써야 할 것이 더 있으면, 국고에서 공급받도록 하여라. 21 이제 나 아닥사스다 왕은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방의 모든 국고 출납관들에게 명령한다.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통달한 학자 에스라 제사장이 너희에게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김없이 그에게 주도록 하여라... 25 또 그대 에스라는, 그대가 섬기는 하나님이 그대에게 주신 지혜를 따라, 그대가 섬기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법관들과 판사들을 뽑아 세워,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 있는 모든 백성의 재판을 맡아 보게 하여라. 율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대들이 가르쳐라. 26 하나님의 율법과 왕의 명령대로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거나 재산을 빼앗거나 옥에 가두거나 하여, 엄하게 다스려라."(새번역)
아닥사스다가 그런 마음으로 에스라를 유다 땅으로 보냈을지라도 하나님은 이 때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때로 바꾸어 사용하셨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에스라가 유다 사람들의 영혼에 페르시아의 피를 수혈할 적격자로 여겼습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의 눈에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페르시아식 교육을 받은 유다에 뿌리를 둔 페르시아인일 뿐이었거든요. 적어도 아닥사스다에게는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표는 달랐습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16대 자손인 제사장이자 율법에 능통한 학자로 유다 땅으로 돌아가 성전 건축 이후 틀에 박힌 신앙생활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유다를 새롭게할 사람이었습니다.
1 이런 일들이 지나가고 난 다음이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이 다스리던 때에, 에스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스라야이고... 그 윗대는 힐기야요... 그 윗대는 사독이요, 그 윗대는 아히둡이요... 그 윗대는 비느하스요, 그 윗대는 엘르아살이요, 그 윗대는 대제사장 아론이다. 6 바로 그 에스라가 바빌로니아에서 돌아왔다. 그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자이다. (스 7:1-6, 새번역)
에스라가 레위 사람들을 찾다
에스라는 아하와(אַהֲוָא) 강가로 유다로 돌아갈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남자만 1,499명, 아마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다면 어림잡아 5,000명은 넘을 만한 수의 사람들이 아하와 강가로 모여들었습니다. 아닥사스다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했겠지요. 에스라의 시대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인원이 대략 4,500명으로 어림잡습니다. 그것도 느헤미야 때 성벽을 쌓고 난 이후(445 BCE)에 예루살렘에 정착한 사람들의 수이니, 그보다도 대략 13년 이전인 에스라의 시대는 예루살렘 인구가 그 보다도 훨씬 모자라는 수일 수 있겠습니다. 한 도시의 수보다 더 많은 인구가 페르시아에서 유프라테스 강 너머 유다로 움직였다? 아닥사스다는 유다 지역 뿐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의 땅들에 페르시아의 바람을 일으킬 만한 충분한 수였겠지요. 그러나 에스라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꼭 와야할 사람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레위 사람들, 그들이 없었습니다!
에스라는 유다로 돌아갈 사람들 가운데 엘리에셀과 아리엘, 스마야, 엘라단, 야립, 엘라단, 나단, 스가랴, 므술람을 가시뱌 지방으로 보냈습니다. 레위인들을 부르려고 말이지요. 아하와 강도, 가시뱌 지방도 현재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에스라서에서 가시뱌 지방은 유대인 공동체가 살던 지역으로 레위인들과 성전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대표들은 가시뱌 지방의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인 잇도에게 가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섬길 레위인들과 성전 일꾼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38명의 레위인들과 120명의 성전 일꾼들이 에스라가 기다리는 아하와 강가로 갔고, 에스라는 그들을 귀환 행렬에 동참시켰습니다. 그러면, 왜 애초부터 이 사람들은 에스라의 귀환 행렬에 함께하지 않았을까요? 또 왜 이 레위 사람들의 가문은 80년 전(538 BCE) 스룹바벨이 유다도 돌아갈 사람들을 불렀을 때 함께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손가락을 자른 사람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시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시 137:4-5)
시편 137편의 미드라쉬에서 4절과 5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모든 레위인들이 침착하게 서서는 그들의 엄지 손가락을 입에다가 넣고 씹어 버렸다. (바벨론 사람들은) 우리에게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노래하지 않겠노라, 우리가 어떻게 노래할 수 있는가?(라며 대답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손가락들을 보여주며 대답하였다. "우리 손가락이 잘려서 이렇게 꽁꽁 싸맸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유다를 멸망시키고 유다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총 세번에 걸쳐서 끌고간 포로의 수가 4,600명입니다. 시편 137편을 보니, 바벨론 사람들은 포로로 끌고간 유다 백성들 가운데 노래하는 레위인들을 자기의 잔치 자리에서 구경거리 삼아 노래를 시켰나봐요. 이 때 레위인들의 마음은 그야 말로 억장이 무너졌겠지요. 레위인들이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거룩한 노래를 바벨론 사람들의 잔치 자리에서 단지 그들의 흥을 돋우어주기 위해서 불러야했던 레위인들은 매우 수치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자기들의 엄지 손가락을 자르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손가락을 자르고 나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고 불렀지만, 가서 할 것이 없는 거지요.
18 (제사장 중)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19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20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22 그는 그의 하나님의 음식이 지성물이든지 성물이든지 먹을 것이나 23 휘장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니라 (레 21:18-23)
레위기는 제사장이 지켜야할 규례들을 말하는데, 그 율법에 따르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손가락을 자른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손 치더라도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동료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리며 수고한 대가를 나누어 받는 참 미안한 처지에 놓이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가시뱌 지방의 레위인들은 그 땅에 남기로 했던 것같습니다. 그리고 선조의 신앙의 절개를 따라 지켜가고 있는 그 후손들도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며 가시뱌에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유대교 랍비들이 소개하는 시편 미드라쉬이며, 에스라가 불렀던 가시뱌 땅의 레위인들이 이야기입니다.
누가 과연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그럼, 왜 에스라는 콕 찝어서 가시뱌 지방의 레위인들을 불러냈을까요? 이 대답은 '상상력'이 동원되어야할 겁니다. 성경에는 이 질문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하고 있지 않거든요. 그리고 가시뱌 지방에 살았던 레위인들의 미드라쉬는 이 상상력에 기름을 붓습니다.
에스라의 때, 이미 1,600km 너머의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고레스 칙령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간 유다 사람들이 515년에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로 귀환 초창기에 못다한 성전을 짓고 제사장 예수아의 가르침을 따라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완공되고도 60년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예루살렘의 유다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선조들이 품었던 뜨거운 열정은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고, 틀에 박힌 신앙의 습관을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이 들려온거지요. 정치적으로는 아닥사스다의 최측근이자, 신앙의 계보로는 대제사장 아론의 자손이었던 에스라는 아닥사스다가 유다로 자신을 보내는 이 때가 흐트러진 예배, 형식은 남아 있으나 예배자는 없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그 곳에서 예배드리는 유다 사람들을 부끄럽게하려고 가시뱌 지방의 레위인들을 불러 모은 것이지요. 함께 가자! 주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는 모세의 때로부터 지켜온 율법 안내서를 따라 기계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기의 손가락을 으스러뜨리는 고통과 성전에서 일할 수 없는 불이익을 감내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가시뱌 지방의 레위인들이여, 당신들이야 말로 진정한 예배자요 제사장이다!
가리개에 덮여 숨겨진 13년
그런데, 에스라의 행적 중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기간이 있습니다. 에스라가 돌아온 458년과 느헤미야가 돌아온 445년 사이의 공백입니다. 느헤미야 8장에 따르면 느헤미야가 돌아온 뒤 에스라는 유다 백성들을 모으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읽습니다. 에스라가 돌아온 것은 그 보다도 13년 전인데, 왜 갑자기 에스라는 귀환 13년 만에 율법책을 읽었을까요? 느헤미야가 오기 전까지 에스라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였을까요?
근대의 학문적인 성경연구 방법이 소개되기 이전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이 기간이 에스라가 다섯 권의 율법 두루마리들(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하나로 엮는 시기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흔히들 '오경'(다섯 경전, Pentateuch), 또는 '율법서'(The Book of the Law)라고 불리는 성경이 '책'(코덱스 codex)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0년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성경은 여전히 두루마리였습니다. 그럼 에스라의 시대에 '창세기'라는 두루마리, '출애굽기'라는 두루마리, '레위기'라는 두루마리, '민수기'라는 두루마리, '신명기'라는 두루마리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첫장 첫절부터 끝장 끝절까지 일목요연한 형태로 있었을까요? 히브리어 구약성경 본문의 어투, 문장 구조, 어휘 등을 연구하면 꼭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때로는 돌판에, 때로는 점토판에, 때로는 두루마리에, 때로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이스라엘의 역사,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 이야기들이 독립적으로 있었다고 설명하지요. 이와 같은 근대 성경연구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전통적인 에스라의 율법 낭독 사건 이해를 근거로 "에스라의 시대에 이르러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오경이 각각의 두루마리로 최종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기록의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에스라에게 '레위기'(레위기 두루마리의 원래 이름은 '봐이크라'이다.)라는 두루마리를 한데 엮어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앞서 설명했던 페르시아로부터 귀환하는 역사 이야기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귀환하는 이들은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위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페르시아 땅에서 일구어온 재산들의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에스라는 성전에 바친 예물을 믿음직한 제사장 열둘에게 맏겼습니다. 그들은 귀환 공동체를 대표하는 제사장이었고, 그 이름으로 보아서(참조. 스 8:18, 24)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손가락을 으스러뜨리는 고통을 감내하였던 기개넘치는 레위인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온 유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면서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수송아지 12마리, 수양 96마리, 어린 양 77마리, 그리고 속죄의 숫염소 12마리를 번제로 드리면서 그들의 심장은 감격으로 고동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땅에 도착하여 살던 사람들을 둘러보니, 페르시아에서 듣던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그들의 예배와 삶은 끔찍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배드림의 감격'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저 관성적으로 성전의 마당을 오갈 뿐이었지요. 그리고 마치 사사 시대의 선조들처럼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어긴채, 가나안의 여인들과 결혼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지가 오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는 유다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고, 예배를 예배답게 세워야하겠다고 마음 먹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손가락을 으스러뜨리며 '레위인'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나갔던 가시뱌 지방의 레위인 제사장들을 거울 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마음 가짐과 성전과 삶에서의 태도를 가르치고자 흩어져있었던 '제사장 지침'을 모으게 하셨습니다(유대교 랍비들은 '레위기'를 '제사장들의 지침서' 토라트 코하님 תורת כהנים 라고 부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룩한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하나님 백성의 삶의 지침'들을 모으게 하셨던 거지요(레위기 17장 이후를 '성결법전' the Holinesscode 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가르침들을 하나의 두루마리로 엮어 '바이크라'(레위기 두루마리의 히브리어 이름)라 불렀던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에스라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레위기를 읽으면 레위기는 딱딱하고 지루한 메뉴얼이 아니라, 당대의 유대인들과 그들과 별다름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계속 메아리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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