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전장터 - 므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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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3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가와 국가와의 전쟁 기록을 남긴 사람은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1481-1425 BCE)입니다. 투트모세 3세가 남긴 전쟁의 기록은 카르낙의 아문 신전에 남아있는데, 상세한 전쟁의 기록은 오늘날에도 전쟁 전술의 역사에서 꼭 한번 다루고 가는 소재라고 합니다. 대군이 이동할 수 있는 평원이 아니라, 상대편이 예측하지 못한 협곡을 통해서 방어군의 허점을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록된 최초의 전쟁 장소가 므깃도입니다. 가나안 땅을 동서로 가르지르는 이스르엘 골짜기의 므깃도가 도대체 왜, 그리고 얼마나 중요하길래, 므깃도가 역사의 첫 전장터가 되었을까요?
고대의 민족과 국가들은 예로부터 서로 교역을 하면서 문화를 서로 주고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그들의 것과 서로 바꾸는 교역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편히 이동할 수 있는 교역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수원지가 있어서 물을 공급받기 수월하던가, 넓은 농토가 있어서 식량을 공급받기도 편해야하고, 왕래하는 길의 지형상의 편이함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또 길에 중요한 도시들이 있어서 목적지까지 오가는 길에 크고 작은 상거래도 있으면 그야말로 제격입니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 곳이 바로 므깃도 입니다. 그래서 므깃도는 기원전 6,000년 부터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살면서 농사도 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상거래의 터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므깃도는 히타이트 제국이 있었던 오늘날의 터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오가는 해안길(Via Maris)이 지나는 길목이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지나가는 곳이기도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해안길로 가든지, 중앙산지 길로 가든지, 또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가든지, 어떤 길을 선택하든, 므깃도는 반드시 거쳐야가하는 교통의 중심지 였습니다. 그러니, 므깃도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나라들 그리고 히타이트 제국의 교차로이며 관문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지리적인 중요성을 이미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가 알아챘습니다. 그리고는 므깃도를 점령하는 것이 천개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과 같다고 천명하고 기원전 15세기에 역사에 기록할 만한 첫 국제전을 치룬 것입니다. 므깃도를 점령하는 것은 제국의 교역로를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길을 소유할 수 있다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오가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을 관리하며 막대한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므로 고대 제국의 왕들이 이 길에 눈독을 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실질적인 관리 도시인 므깃도는 가장 얻고 싶은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므깃도의 전술상의 중요성 때문에 성경에도 므깃도와 관련된 많은 전쟁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할 때에 므깃도를 점령하였다는 기록은 물론이고(수 12:21), 사사 드보라와 바락의 전쟁에서도 므깃도 앞의 평원과 물가들은 주요한 전장터였습니다(삿 5:19).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후가 아합의 아들이자 당시 왕이었던 요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켜 요람을 나봇의 포도원 터에서 죽일 때에 함께 있었던 남왕국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예후를 피해서 도망하다 죽은 곳이 므깃도이기도 합니다(왕하 9:2).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 요시아가 이집트 파라오 느고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곳도 므깃도이지요(왕하 23:29).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처럼 이 곳의 중요성을 간파한 솔로몬은이곳에 오늘날의 기갑부대라 말할 수 있는 전차부대의 주둔지로 병거성을 쌓았습니다(왕상 9:15), 그도 그럴 것이 므깃도가 전략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적들에게 빼앗길 경우, 사마리아 지역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까지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하나님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 므깃도의 무장과 방어에 공을 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솔로몬 시대 이후로 아합 때에는 므깃도를 더욱 요새화 시켰습니다. 방어에 용의하도록 수로 공사를 했고, 이곳 저곳에 현재 발굴된 것만으로도 450필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17개의 마굿간들을 만들어서 전략적인 방어요새이자, 병거성으로 체계화 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이곳 므깃도와 므깃도가 전략적으로 방어하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빼았겼을 경우, 왕국의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므깃도가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서 지켜내야만 했습니다. 전쟁의 패배는 곧 왕국의 멸망, 그리고 성전의 파괴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609년 요시아 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한 후, 왕국은 급격히 쇠토하였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왕국이 무너졌고,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고대 서아시아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기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던 므깃도, 그리고 왕국과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내야만 했던 므깃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이야기는 나중에 요한에게 “아마겟돈”이라는 이름으로 선과 악이 겨루는 전장의 모티브가 됩니다. 므깃도의 역사를 알고 있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요한의 편지를 받아보며, 아마겟돈에서 벌어질 전쟁의 예언을 읽으면서, 피 비린내 나는 전장터인 므깃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아무도 살아나올 수 없으리만치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했던 그 땅을 말입니다.
므깃도에 올라서면 눈에는 평온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지만, 귀에는 아직도 그 때 병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고대의 민족과 국가들은 예로부터 서로 교역을 하면서 문화를 서로 주고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그들의 것과 서로 바꾸는 교역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편히 이동할 수 있는 교역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수원지가 있어서 물을 공급받기 수월하던가, 넓은 농토가 있어서 식량을 공급받기도 편해야하고, 왕래하는 길의 지형상의 편이함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또 길에 중요한 도시들이 있어서 목적지까지 오가는 길에 크고 작은 상거래도 있으면 그야말로 제격입니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 곳이 바로 므깃도 입니다. 그래서 므깃도는 기원전 6,000년 부터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살면서 농사도 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상거래의 터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므깃도는 히타이트 제국이 있었던 오늘날의 터키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오가는 해안길(Via Maris)이 지나는 길목이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지나가는 곳이기도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해안길로 가든지, 중앙산지 길로 가든지, 또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를 가든지, 어떤 길을 선택하든, 므깃도는 반드시 거쳐야가하는 교통의 중심지 였습니다. 그러니, 므깃도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나라들 그리고 히타이트 제국의 교차로이며 관문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지리적인 중요성을 이미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가 알아챘습니다. 그리고는 므깃도를 점령하는 것이 천개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과 같다고 천명하고 기원전 15세기에 역사에 기록할 만한 첫 국제전을 치룬 것입니다. 므깃도를 점령하는 것은 제국의 교역로를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길을 소유할 수 있다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오가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을 관리하며 막대한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므로 고대 제국의 왕들이 이 길에 눈독을 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실질적인 관리 도시인 므깃도는 가장 얻고 싶은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므깃도의 전술상의 중요성 때문에 성경에도 므깃도와 관련된 많은 전쟁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할 때에 므깃도를 점령하였다는 기록은 물론이고(수 12:21), 사사 드보라와 바락의 전쟁에서도 므깃도 앞의 평원과 물가들은 주요한 전장터였습니다(삿 5:19).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후가 아합의 아들이자 당시 왕이었던 요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켜 요람을 나봇의 포도원 터에서 죽일 때에 함께 있었던 남왕국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예후를 피해서 도망하다 죽은 곳이 므깃도이기도 합니다(왕하 9:2).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 요시아가 이집트 파라오 느고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곳도 므깃도이지요(왕하 23:29).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처럼 이 곳의 중요성을 간파한 솔로몬은이곳에 오늘날의 기갑부대라 말할 수 있는 전차부대의 주둔지로 병거성을 쌓았습니다(왕상 9:15), 그도 그럴 것이 므깃도가 전략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적들에게 빼앗길 경우, 사마리아 지역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까지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은 하나님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 므깃도의 무장과 방어에 공을 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솔로몬 시대 이후로 아합 때에는 므깃도를 더욱 요새화 시켰습니다. 방어에 용의하도록 수로 공사를 했고, 이곳 저곳에 현재 발굴된 것만으로도 450필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17개의 마굿간들을 만들어서 전략적인 방어요새이자, 병거성으로 체계화 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이곳 므깃도와 므깃도가 전략적으로 방어하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빼았겼을 경우, 왕국의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므깃도가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서 지켜내야만 했습니다. 전쟁의 패배는 곧 왕국의 멸망, 그리고 성전의 파괴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609년 요시아 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한 후, 왕국은 급격히 쇠토하였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왕국이 무너졌고,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고대 서아시아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하기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던 므깃도, 그리고 왕국과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내야만 했던 므깃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이야기는 나중에 요한에게 “아마겟돈”이라는 이름으로 선과 악이 겨루는 전장의 모티브가 됩니다. 므깃도의 역사를 알고 있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요한의 편지를 받아보며, 아마겟돈에서 벌어질 전쟁의 예언을 읽으면서, 피 비린내 나는 전장터인 므깃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아무도 살아나올 수 없으리만치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했던 그 땅을 말입니다.
므깃도에 올라서면 눈에는 평온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지만, 귀에는 아직도 그 때 병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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