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유일한 하나님은 여호와 시라는 것(신 6:4)은 오늘날 유대교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는 것을, 여호와께서 오직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요? 무엇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고백하는 신앙에 가장 위협이 되었을까요? “문화”입니다. 흔히들 이방의 종교나, 가나안의 신들이 창조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위협하는 적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물리적인 “신들의 전쟁”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런 이방의 신들은 반드시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 슬며시 들어와서 가랑비에 온 옷이 흠뻑 젖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적셨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옷이 젖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다가 결국은 큰 물에 빠져 죽게되었습니다.

아라드(우리말 성경. 아랏)에 가면, 남쪽 유대 광야에 살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성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소에는 두개의 돌 기둥이 세워져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이렇게 세워진 돌 기둥들을 “주상”이라고 번역하였는데요(참고. 출 34:13), 이렇게 세워진 돌들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성소가 정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성소라면, 한 개의 돌 기둥, 한 개의 향단이 있어야하는데, 돌 기둥도 두 개, 향단도 각각의 돌 기둥 앞에 한 개씩 있는 거예요. 그러니, 성소의 모양 만으로 본다면, 두 명의 신을 섬기는 제단이 되는 셈입니다. 그곳은 분명히 하나님을 위한 성소인데 말입니다!

[caption id="attachment_1682" align="alignnone" width="3695"]Holy of Holies 아라드의 성소. 뒤에 보이는 돌 기둥 두개는 각각 여호와(왼쪽) 하나님과 아세라(오른쪽)를 의미한다.[/caption]

 

이스라엘 백성은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주변 국가나 민족들과 함께 살을 부대끼면서 살아야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도 했고, “더 잘 살기 위해서” 교역을 하기도했습니다. 과거에도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국제관계가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서 때로는 친구, 때로는 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국제관계에서 속국은 지배국의 강제 아래에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종교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요즈음 말로 선진국의 문물을 따라하는 것이 자기의 사회적인 지위를 드러내 보이는 수단이기도 했지요. 강제이든 자발적이든 간에 문화의 교류는 피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정체성이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문화적인 교류 가운데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나아가는가?”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정체성은 “다름”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와 “너”가 똑같다면, “나”의 정체성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창조의 하나님, 여호와가 나의 유일하신 주인이라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이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나의 하나님”과 “그들의 하나님”과 차이가 없게 되는 거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산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의 중요한 사건들은 산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믿음을 증거받았고,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아론은 “호르산”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모세는 “느보산”의 한 봉우리에서 죽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율법을 낭송하였고, 예루살렘은 “시온산” 위에 세워졌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가나안 최고의 신인 바알과 그의 아내 아세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평지, 풍요로운 평야지대의 농경지의 신들이었거든요. 남편인 바알은 천둥과 번개의 신입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고, 아내인 아세라는 땅에서 그 물을 머금고 마치 아이를 출산하듯이 소출을 내는 거지요.

[caption id="attachment_1683" align="aligncenter" width="321"]Baal 폭풍(천둥 번개)의 신인 바알은 그의 손에 칼 또는 번개를 들고 있다.[/caption]

광야에서 유랑하고 전쟁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던 출애굽한 백성들이 정복 전쟁을 마치고 그 땅에 정착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목과 더불어 이제 농업이라는 새로운 사회 경제 구조에 적응해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가나안의 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좀 더 잘 살아보겠노라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주변 나라들과 형-동생 하며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문화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노예생활을 하다가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람들보다는 안정적으로 그 땅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문화가 더 화려해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만나고 주변 국가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것이 더 좋아 보이고, 더 합리적이어 보이고, 더 문명적이어 보였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들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최고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은 버리지 않되, 단지 바알의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만 앉혀 놓았을 뿐, 글쎄, 여호와 하나님의 아내가 아세라랍니다! 아라드의 성소에 있는 두 개의 돌 기둥과 향단들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아내 아세라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caption id="attachment_1684" align="aligncenter" width="302"]Twins 풍요와 다산의 신인 아세라는 쌍둥이를 잉태하고 있다.[/caption]

문화적인 종속, 무분별한 문화의 흡수가 신앙의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요시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영향 아래에서 유다 땅에 범람하던 이방의 문화와 그 문화의 탈을 쓰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깊숙히 뿌리내린 이방의 종교와 철학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규정하는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예배를 바로 잡고자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622BCE). 아라드의 그 성소가 훼파된 때가 기원전 7세기, 그러니까, 그 훼파된 성소는 요시아의 종교개혁의 고고학적인 증거입니다.

시대가 변하였습니다. 새로운 문화와 풍조들이 오늘을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소개됩니다. 그 안에서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은 위협을 받습니다. 그 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나 소견이 좁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소위’ 문화에 개방적인 사람들은 뭔가 있어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억할 것은 기독교인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좋다 좋다해도 그것이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도 “다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위협하고 우리의 신앙의 기준과 동떨어진 문화이거나, 그 반대의 풍조라면, 좀 답답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꽉 막힌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거절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정체성”입니다. 그 문화 속에서 우리를 창조하신 한 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성경을 통해서 명령하신 말씀들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도 그때 아라드에서 살던 사람들처럼 두개의 돌 기둥을 세우게 될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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