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서신] 평가의 잣대-헤로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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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헤롯의 무덤이 발견이 되었다고 난리들입니다. 베들레헴 인근에 헤롯이 만들어 놓은 가장 대표적인 걸작품인 헤로디움에서 헤롯의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헤로디움은 헤롯의 여름 별장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헤롯이 건축한 건축물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 이름을 따서 이름붙인 장소이기도 하지요. 그만큼 헤롯이 공을 들이고, 사랑했던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만 평이나 되는 대지에 현대의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정방형의 구획들로 잘 준비된 도시 계획에 따라,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헤로디움을 보면, 가히 옛 사람들의 토목기술이 얼마나 정교하고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헤로디움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산 위에 세운 원형 요새입니다.
해발 약 740m의 유대 광야 언덕 위에 원형으로 40m 높이의 왕궁 요새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봐서는 그렇게 멋진 건축물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더운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요새 벽을 따라 흙을 메워 인공 산처럼 만들었거든요. 동그랗게 생긴 요새의 네 귀퉁이에는 두께만으로도 충분히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망대들과 사우나 시설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원뿔형의 요새의 옆구리에 헤롯 대왕의 무덤이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꼭꼭 숨겨져 있었던 것이지요. 유대인도 아닌 헤롯 왕가가 처음으로 유대인들의 통치자가 된 것은 헤롯의 아버지인 안티파터 (Antipater)의 때 였습니다. 카이사르 (Caesar)의 도움으로 유다 (Judea) 땅의 왕이 된 안티파터가 죽은 후(기원전 43년), 헤롯이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의 도움으로 유다 땅의 왕이 된 거지요 (기원전 37년). 이곳은 헤롯의 아픈 상처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헤로디움이 있는 장소에서 기원전 40년에 유대인들이 지지하던 지도자 안티고누스와 헤롯이 전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에돔 사람인 헤롯의 통치가 맘에 들지 않았던 유대인들과 파르티아인들이 서로 연합해서 헤롯을 공격한 거지요. 헤롯은 이곳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마저 잃게 됩니다. 그러니 헤롯은 자신의 승전 기념으로 이곳에 여름 궁전을 세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 패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더욱이 전쟁에서 죽은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곳에 이토록 멋진 건축물을 남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헤롯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헤롯이 죽은 후에 예루살렘에 묻히지 않고, 이곳 베들레헴 남동쪽의 헤로디움에 매장되었다는 것을 보아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지요. 아마 어머니가 죽은 곳에서 나도 함께 묻히고 싶다는 효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러고 보면 헤롯도 참 인간적이지요? 예루살렘 성전의 웅대함, 빌라도의 법정으로 알려진 안토니아 요새, 지금도 유대인 구역에 그 일부가 남아 있는 헤롯의 궁전 터(일각에서는 제사장의 집이라고도 합니다),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요세푸스가 말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거대한 극장과 연설장,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멋진 건축물과 법정, 그리고 두터운 성벽, 지중해 해변에 세워진 거대한 로마식 도시 가이사랴의 원형극장과 경기장, 요새와 방파제, 가이사랴로 연결되는 8 킬로미터의 수로, 유대광야 한가운데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 마사다와 광야의 길목마다 세워진 요새들, 예루살렘 인근의 오아시스에서 여리고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긴 수로들과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길, 아름다운 헤로디움, 유대 광야에 만들어져서 아직까지 지프차의 도로와 군사용 도로로 사용되고 있는 도로들, 이처럼 웅장한 토목 공사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헤롯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역사를 말할 때에, “만약에 … 였다면” 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말이라고들 하지만, 만약에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 헤롯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스라엘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당대에 주변 국가와는 견줄 수 없는 웅대함을 자랑했던 유대아를 어떻게 헤롯과 별개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헤롯만큼 정치력이 뛰어난 정치가가 없었어요. 헤롯의 시대 로마도 둘로 나뉘어져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유대아 안에서는 유대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방인인 헤롯이 왕 노릇 하려니 얼마나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을 것이며, 또 그 처세술이 얼마나 뛰어났겠습니까? 헤롯이 없었다면 신약시대 유다 (유다, 유대아, Judae)의 영광은 없었습니다. 구약의 아합과 더불어 신약 시대의 헤롯은 가장 건축을 많이 한 왕입니다. 구약 시대의 유적지로 남아 있는 대부분은 아합 왕 때의 건물들이고, 중간사 때(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사이에 놓인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때까지)와 신약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웅대한 건축물의 주인은 헤롯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성서에서 악명 높은 왕이라는 거지요. 참 아이러니 하지요? 아마도 그렇게 대단한 군사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강제로 동원되어야만 했던 수많은 유대인들의 원성이 그 평가 안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 헤롯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얼마나 유다의 군사적인 능력을 끌어올렸는지, 아니면 유다의 경제를 얼마나 활성화시켰는지가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했는가?”였습니다. 결국 성경의 오롯한 눈은 헤롯의 신앙과 삶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헤롯의 시대에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백성들을 향한 것이라는 거짓 명분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강제로 동원되었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전쟁의 노예들이 사들여지고 팔려나갔을까요? 헤롯이 가장 사랑했다고 말하는 헤로디움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해야했을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사람과 교회 평가의 판단 기준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삼는 것을 보면, 성경만 ‘성경적’으로 보고,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은 ‘성경과는 별개’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해발 약 740m의 유대 광야 언덕 위에 원형으로 40m 높이의 왕궁 요새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봐서는 그렇게 멋진 건축물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더운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요새 벽을 따라 흙을 메워 인공 산처럼 만들었거든요. 동그랗게 생긴 요새의 네 귀퉁이에는 두께만으로도 충분히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망대들과 사우나 시설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원뿔형의 요새의 옆구리에 헤롯 대왕의 무덤이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꼭꼭 숨겨져 있었던 것이지요. 유대인도 아닌 헤롯 왕가가 처음으로 유대인들의 통치자가 된 것은 헤롯의 아버지인 안티파터 (Antipater)의 때 였습니다. 카이사르 (Caesar)의 도움으로 유다 (Judea) 땅의 왕이 된 안티파터가 죽은 후(기원전 43년), 헤롯이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의 도움으로 유다 땅의 왕이 된 거지요 (기원전 37년). 이곳은 헤롯의 아픈 상처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헤로디움이 있는 장소에서 기원전 40년에 유대인들이 지지하던 지도자 안티고누스와 헤롯이 전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에돔 사람인 헤롯의 통치가 맘에 들지 않았던 유대인들과 파르티아인들이 서로 연합해서 헤롯을 공격한 거지요. 헤롯은 이곳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 마저 잃게 됩니다. 그러니 헤롯은 자신의 승전 기념으로 이곳에 여름 궁전을 세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 패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더욱이 전쟁에서 죽은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곳에 이토록 멋진 건축물을 남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헤롯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헤롯이 죽은 후에 예루살렘에 묻히지 않고, 이곳 베들레헴 남동쪽의 헤로디움에 매장되었다는 것을 보아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지요. 아마 어머니가 죽은 곳에서 나도 함께 묻히고 싶다는 효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러고 보면 헤롯도 참 인간적이지요? 예루살렘 성전의 웅대함, 빌라도의 법정으로 알려진 안토니아 요새, 지금도 유대인 구역에 그 일부가 남아 있는 헤롯의 궁전 터(일각에서는 제사장의 집이라고도 합니다),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요세푸스가 말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거대한 극장과 연설장,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멋진 건축물과 법정, 그리고 두터운 성벽, 지중해 해변에 세워진 거대한 로마식 도시 가이사랴의 원형극장과 경기장, 요새와 방파제, 가이사랴로 연결되는 8 킬로미터의 수로, 유대광야 한가운데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 마사다와 광야의 길목마다 세워진 요새들, 예루살렘 인근의 오아시스에서 여리고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긴 수로들과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길, 아름다운 헤로디움, 유대 광야에 만들어져서 아직까지 지프차의 도로와 군사용 도로로 사용되고 있는 도로들, 이처럼 웅장한 토목 공사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헤롯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역사를 말할 때에, “만약에 … 였다면” 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말이라고들 하지만, 만약에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 헤롯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스라엘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당대에 주변 국가와는 견줄 수 없는 웅대함을 자랑했던 유대아를 어떻게 헤롯과 별개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헤롯만큼 정치력이 뛰어난 정치가가 없었어요. 헤롯의 시대 로마도 둘로 나뉘어져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유대아 안에서는 유대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방인인 헤롯이 왕 노릇 하려니 얼마나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을 것이며, 또 그 처세술이 얼마나 뛰어났겠습니까? 헤롯이 없었다면 신약시대 유다 (유다, 유대아, Judae)의 영광은 없었습니다. 구약의 아합과 더불어 신약 시대의 헤롯은 가장 건축을 많이 한 왕입니다. 구약 시대의 유적지로 남아 있는 대부분은 아합 왕 때의 건물들이고, 중간사 때(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사이에 놓인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 때까지)와 신약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웅대한 건축물의 주인은 헤롯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성서에서 악명 높은 왕이라는 거지요. 참 아이러니 하지요? 아마도 그렇게 대단한 군사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강제로 동원되어야만 했던 수많은 유대인들의 원성이 그 평가 안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 헤롯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얼마나 유다의 군사적인 능력을 끌어올렸는지, 아니면 유다의 경제를 얼마나 활성화시켰는지가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했는가?”였습니다. 결국 성경의 오롯한 눈은 헤롯의 신앙과 삶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헤롯의 시대에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백성들을 향한 것이라는 거짓 명분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강제로 동원되었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전쟁의 노예들이 사들여지고 팔려나갔을까요? 헤롯이 가장 사랑했다고 말하는 헤로디움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해야했을까요? 그럼에도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사람과 교회 평가의 판단 기준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삼는 것을 보면, 성경만 ‘성경적’으로 보고,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은 ‘성경과는 별개’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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