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꼭 편지로 말하고 싶었던 구절이 있습니다. 지난 봄 학기에 지도 교수님의 "에스겔" 수업을 들었는데, 에스겔 16:59-60절을 해석해 주시던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아!" 하는 소리가 강의실의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좀 모호한 그 구절에 그런 의미가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이야기는 언젠가 제가 꼭 설교자의 자리에 섰을 때에 설교 본문으로 택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차에 성탄절이 되니, 에스겔 16:59-60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나 싶어서, 내용이 좀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무겁게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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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산에 올라서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 '옛 성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슬람의 성지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이슬람의 3대 성지 중의 하나인 예루살렘의 "바위사원"이 우뚝 서 있기 때문입니다. 691년에 세워진 바위사원의 지붕은 정말 80kg의 황금을 녹여서 1993년도에 발라 놓았는데, 해가 쨍한 날이든 아니든, 탁한 석회질 돌들의 빛바랜 누런색을 뚫고 유난히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 지붕은 사람들의 시선을 제일 먼저 빼앗아버리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상징적으로 그려지는 그림이 바로 이 황금지붕의 바위사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바위사원의 뜰에 들어가 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2000년 당시 보수당의 수장이었던 아리엘 샤론이 바위사원에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들어가서는 속된 말로 깽판을 놓은 이후, 한동안 이스라엘 사람을 비롯해서 외국인에게까지도 개방하지 않다가 최근에서야 하루에 겨우 몇 시간 정도 들어갈 수 있게 했으니 말입니다 (글을 쓴 것은 2005년인데, 지금까지도 이 뜰에는 오전 오후 제한된 시간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들어간다손 치더라도 뜰에만 머무를 수 있기 때문에, 정말로 바위사원 안에 들어가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이슬람 교인들에게만 출입을 허락하기 때문이지요. 한국에서 온 이슬람 교인이라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 사원에 한 번 들어가 보겠다고 제 신앙의 지조까지 팔아먹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한 번도 바위사원 안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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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위사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오늘 제가 형님께 드리는 편지 내용은 아닙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성전이 오늘 제가 쓰는 편지의 소재입니다.

에스겔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제사장이자, 예언자였습니다. 아직 은 유다 왕국이 완전히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시절, 바벨론에 의해서 외환을 겪고 곧 역사 속에서 사라져갈 무렵, 에스겔은 희망의 실오라기라도 잡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유다 백성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거라는 거지요.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왜 심판하시는지에 대해서 묻는 유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앙의 상태를 조목조목 따지고 듭니다. 에스겔은 비유와 환상을 통해서 유다의 신앙상태를 고발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겉은 하나님의 성전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이방신들이 가득하고(겔 8:1-10), 보이기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방신에게 절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겔 8:13-16). 더군다나 백성들을 이끌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더 하다고 (겔 8:11-12) 한탄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유다의 모습을 보고 직접적으로 "역겹다"고까지 하셨으니,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여러 가지 비유로 유다의 신앙상태를 말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비유는 유다가 마치 "창녀" (겔 16) 같다는 거지요.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모습을 이렇게 비유적으로, 그리고 너무나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에스겔을 당시의 사람들이 반기지 않았을 거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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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의 신들을 따르던 예루살렘의 영적상태를 질타하는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신다는 벼락 같은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러고는 정말로 에스겔 10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지성소를 떠나서, 성전의 문지방으로 (겔 10:4), 그리고 문지방을 떠나서 공중의 그룹들에게로 (겔 10:18), 그리고 성전의 동쪽 문으로 (겔 10:19), 그리고 결국 성전과 예루살렘을 떠나서,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산 (감람산) 꼭대기 (겔 11:23)로 점점 성전에서 멀어져 가시는 모습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유다 멸망의 원인이 바벨론의 전투력에 밀려서 전쟁에서 패망하게 될 빈약한 유다의 국방 때문이 아니라 이방신들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배반적인 신앙이 만들어낸 유다 백성의 신앙 정체성의 위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성전과 예루살렘을 떠나실 것이라는 에스겔의 폭탄선언! 아,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모호한 말이 나옵니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는, 네가 한 맹세를 하찮게 여겨, 그 언약을 깼으니, 나도 네가 한 것과 똑같이 너에게 하겠다. 그러나 나는 네 젊은 시절에 내가 너와 맺은 언약을 기억해서,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 (겔 16:59-60)


여태까지 유다의 죄가 어쨌다느니, 마치 창녀와 같다느니, 소돔과 사마리아가 유다보다 훨씬 덜 죄를 지었다느니 하더니만, "그래, 그렇게 네가 언약을 깼으니, 그 언약을 기억해서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말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교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에, 수업을 듣고 있던 다섯 명 남짓의 누군가가 분명히 대답을 했어야 했는데,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도 속으로 "그러네. 정말 이게 말이 안 되네." 하고만 생각했지요. 교수님께서 제게 그러시더군요. "영어나 너희 말로 쓰인 성경본문은 이제 잊어버리고 히브리어로 된 성경본문을 잘 보라."고 말이지요. 무슨 말 인고하니, "그러나"로 번역하지 말고, "그래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너는, 네가 한 맹세를 하찮게 여겨, 그 언약을 깼으니, 나도 네가 한 것과 똑같이 너에게 하겠다. 그래서 나는 네 젊은 시절에 내가 너와 맺은 언약을 기억해서,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형, 그런데 아직도 헷갈리시지요?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땅, 가나안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마치 이전의 가나안 사람들이 하던 것같이 역겨운 일들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지요(레 18:24). 만약 스스로를 더럽히면, 더불어 머무르는 땅까지 더럽게 된다고(레 18:25)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더럽힌 땅을 하나님이 벌하실 것이고, 그래서 땅은 자기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토해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땅이 이전에 살던 가나안의 주민을 쫓아내고 이스라엘 백성을 받아들인 것과 같이, 자신을 더럽히고, 땅을 더럽히면 또 다시 땅은 이스라엘 백성을 토해낼 것이라는 겁니다(레 18:25-29). 이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나더니만, 배가 부른 거예요. 가나안 땅에 대한 애착심도 없어지고,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도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유다는 하나님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지요. 하나님을 떠나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어버리면 그만이거든요. 그리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는 것도 간단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자동으로 언약은 깨지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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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려고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계약(언약)은 깨져 버린 것이지요. 하나님과유다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게 유다의 백성들을 토해내게 하셔야 하고,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버려야 합니다. 형도 사업을 하시니, 이 정도의 계약서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유다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너희들이 내가 싫어서 나와의 약속을 깨뜨리고, 이방신과 함께 살겠다 이거지? 좋아. 그러면 나도 내가 너희들과 한 약속을 깨뜨리겠어. 우리가 서로 한 약속대로라면, 네가 약속을 깨면, 우리의 약속의 관계도 자동으로 깨지고 나도 원칙대로 너와 나의 관계를 남남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지만,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해줄 순 없지. 그러니 나도 애초에 우리가 했던 약속을 깨고, 계속 이 약속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유지하겠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넌 내 거야! 자, 이제 내가 하나님인 줄 알겠지?" 


허걱! 하나님이 신발에 달라붙은 껌같이 느껴져서 이제 하나님을 떼어 버리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놓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은 속도 없나?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네가 저지른 모든 악한 일을 용서받은 다음에, 네가 지난 일들을 기억하고, 놀라고, 그리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도 열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겔 18:63)


이 정도면, 에스겔이 말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거의 스토커 수준 아니겠습니까? 한번 물면 끝까지 놓지 않는!

제가 성탄절을 앞두고 에스겔의 이야기를 꺼내든 것은, 2,000년 전의 예수님의 탄생 역시 마치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메세지의 또 다른 형태의 성취가 아닌가 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희망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던 죄가 만연한 이 땅에, 약속대로라면, 죄의 값을 물어서 그냥 모든 사람들을 노아의 홍수 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싹 정리해 버리시면 될 것을, 예수님 태어나시기 약 600년 전 에스겔에게 하셨던 말씀 그대로 "그래, 너희들이 내가 싫어서 나와의 약속을 깨뜨리고, 죄 속에서 그냥 살겠다 이거지? 좋아, 그러면 나도 내가 너희들과 한 약속을 깨뜨리겠어. 우리가 서로 한 약속대로라면, 네가 약속을 깨면, 우리 약속의 관계도 자동으로 깨지고, 나도 원칙대로 너와 나의 관계를 남남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냥 너희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지만,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놔둘 순 없지. 그러니 나도 애초에 우리가 했던 약속을 깨고, 계속 이 약속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유지하겠어. 내가 너희들을 살려둘 거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넌 내 거야! 자, 이제 내가 하나님인 줄 알겠지?"라고 말씀하시고는, 죽어야할 우리를 놓아주질 않으시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결국은 우리를 살려주셨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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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유다의 백성들에게는 이 하나님이 스토커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형,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말한다면, 과연 그 반응은 어떨까요? 혹시 하나님을 스토커로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또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 때문에 그동안 지었던 죄들을 모두 용서받고 사망으로부터 자유로와 졌는데, 지금 과거에 지었던 우리의 죄를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하나님 앞에서 입도 껌벅 못하고 있나요?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님이신 것을 알고는 있는 건가요? 성탄절을 앞두고 즐거우면서도, 괜스레 두려운 마음으로 편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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