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제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엄청나게 높고 위압적인 "장벽" 입니다. UN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명칭은 immense wall 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6일전쟁이후 정치적인 타협으로 만들어진 Green Line(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잠정적 영토경계)을 기준으로 한다면,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땅(West Bank)에 속하는 지역에서 살고 있는데에다가 광야 쪽의 창문을 열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건너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장벽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그 장벽이 자신들의 안전을 보호해주는 "안보"의 상징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을 가두어 옥죄려는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의 상징입니다. 예루살렘 주변에 호전적인 아랍인들의 거주지들을 장벽으로 둘러싼 이 후로 예루살렘에서 발생하는 테러가 약 90% 넘게 감소하였으니 "안보"의 상징인 것도 맞지만, 동시에 허가증이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대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장벽을 만든 이래로 팔레스타인 경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분노"의 상징이라고 부르는 것도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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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UN 보고서에 의하면 전체 약 3,700,000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 중에서 약 68,000명의 사람들 (대략 2% 내외) 만이 이스라엘 지역으로 나와서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장벽이 세워지기 이전과 비교하면 1/3 수준입니다. 국제법상 팔레스타인 지역인 요단강 서안 (West Bank) 지역과 이스라엘이 맞대고 있는 국경의 길이가 약 304km인데,  이미 이스라엘 정부는 약 140km에 걸쳐서 장벽을 설치하였고(2007년 기준), 매년마다 허가증을 발급하는 것이 줄어들고 있으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내부경제 의존률은 더욱 높아질 겁니다. 이런 장벽 뿐만 아니라, 검문소는 더 대단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하는 검문소가 요단강 서안 지역에만 528개가 있는데(2007년 기준),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이 검문소에서 짧게는 수 분, 길게는 몇 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허다하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높은지라, 성지순례객이 넘쳐나는 베들레헴 지역(팔레스타인 자치 지역)같은 경우에도 유대인 운전사가 운전하는 버스는 성지순례객을 태우고 있을지라도 출입이 금지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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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팔레스타인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는 요단강 서안지역 "라말라"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북쪽의 요단강 서안지역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금이나 옛적이나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언제부터 홀대를 당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포로기 부터다. 북왕국의 멸망 때부터다. 아니 그 이전 통일왕국 시대부터다. 또는 야곱의 시대부터다. 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갈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헤롯대왕이 죽은 후 12년째 되던 때에 아마 예수님의 나이가 청소년기에 이르렀을 때즈음이 아닐까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월절날 유대인의 회당과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에 사람의 뼈를 뿌리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급진적인 사마리아 사람들때문에 유대인들의 유월절 축제는 중단되었고 유대인들이 예전부터 가져왔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증오심은 점점 더 거세갔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마리아 사람" שומרוני(쇼므로니) 이라는 말은 지독한 욕설이기도 했지요. (학문적으로는 논쟁이 있을 수 있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한 민족인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 왕래도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다수는 갈릴리 지역에서 유대 지역으로 오기 위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동편의 베레아 지역으로 돌아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 할 때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눅 9:51-56). 심지어는 물조차 얻어 먹지 못했지요 (요 4:9).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오늘날 유대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을 나누는 벽처럼,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세워졌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세운 높은 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벽을 허물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고, 여호수아가 율법을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낭독하였던 사마리아 지역의 중심지 세겜(수가성)에 이르렀습니다 (요 4).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 모두가 조상이라고 부르는 야곱의 우물 앞에 도착했을 때는 햇빛이 머리 꼭대기에 있는 정오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여자들이 하는 주요한 일은 아침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우물에서 물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쩐 일인지 남들이 오지 않는 대낮에 우물을 찾았습니다. 그 여인이 게을러서인지, 아니면 사람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했거나 사람들과 섞여 살지 못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대인인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상종할 수 없었던 부류의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 사람을 헤아리는 수에도 들지 못하는 한 여성, 그 여성 가운데에서도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하고 남들이 오지 않은 시간에 우물을 찾아와야하는 숨겨진 사연이 있는 여인을 예수님께서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그 여인의 만남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여자의 반응은 쌀쌀 맞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작은 '만남'부터입니다. 반목하였던 유대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단 한번의 만남으로 여인의 운명이 바뀌어졌으니 말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곧바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이고, 가장 열정적으로, 그리고 많은 수를 전도했던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이 아닐까 해요. 성경을 보니, 이 여인 때문에 그 동네의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요 4:39). 그 뿐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이라면 치를 떨며 싫어하였고, 그들에게는 잠자리는 커녕 마실 물조차도 주기를 꺼려했는데, 그런 그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자기들과 함께 더 지냈으면 하였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도 흔쾌히 이틀 동안 그곳에 머무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 모두가 큰 변화입니다. 그 기간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믿음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놀라운 변화들은 벽을 허물고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신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만난 여인에 대해서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포테이네 (Φωτεινή '깨우친 사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물만을 알던 사람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물을 깨우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요 4:14). 정교회의 전승을 따르자면, 이 여인은 자기의 모든 가족들을 전도하였고, 북아프리카로 두 아들을 포함한 전가족이 전도하러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이들을 전도하고 환상 중에 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쫒아 로마로 가지요. 북아프리카의 믿음의 동역자들과 포테이네의 가족들이 대거로 로마로 들어오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당시의 황제였던 네로에게 전해집니다. 네로는 그들이 자기를 숭배하는 사람들로 바꾸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네로가 죽은 딸을 대신해서 매우 아끼던 돔니나(Domnina)와 그 가족, 그리고 하인들을 비롯한 모든 식솔들마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자 포테이네와 그 가족들을 모두 죽입니다. 포테이네는 감옥을 하나님의 집으로 바꾸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생명의 물, 영생의 물을 마셨기 때문이지요. 그 모든 시작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부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낯선 여인과의 만남이 보여주듯, 만남은 변화의 시작이고, 기적의 디딤돌입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 세워진 벽을 쓰러뜨리는 것도 만남이고, 경계를 넘어 서로 하나되는 것도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교회는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만나고, 예수님과 만나고, 성령님과 만나고, 믿음의 동역자들과 만나는 곳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면 서로 만날 수 없습니다. 벽 너머에 일어나는 일에 무감각해 질 수 밖에 없겠지요. 예수님처럼 그 벽을 허물고 벽 너머로 들어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