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의 갈릴리"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처음 나온 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갈릴리 지역을 이방인이 사는 지역과 같은 눈초리로 매섭게 보던 시각은 이사야 시대에도 여전했다 (사 9:1). 갈릴리 지역이 "이방의 갈릴리", 그러니까 "이방인이 사는 갈릴리", 또는 "마치 이방인이 사는 듯한 갈릴리"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세뇌된 이유 중의 하는 갈릴리 지역이 문화의 교차로에 있기 때문이다.

유럽지방에서 가나안을 거쳐 이집트로 가는 사람들이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주변에 살던 사람들이 가나안을 거쳐 이집트로 가기 위해서 육로를 선택한다면 반드시 지나야하는 곳이 바로 갈릴리 지역이었다. Pax Romana를 외치던 로마인들이 가나안과 그 주변 지방을 지나는 통상로를 만들면서 지중해 해변으로 통하는 Via Maris를 건설하였는데, 그 도로가 갈릴리를 관통한다. 그 중에서도 물이 가장 풍부했던 갈릴리 호수 주변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떠들어 대는 외국인들과 그들이 각 나라에서 가져온 진기한 물건들, 동물들, 그들의 신들과 철학들로 넘쳐났다.

 



 

가끔씩 왜 거라사에 돼지 떼가 있었는지, 그것이 방목한 돼지들인지, 아니면 야생 돼지인지를 물어 보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그걸 난들 어떻게 아나? 하지만, 그런 질문도 가능한 것이 일단 성경에는 그것이 먹을 요량으로 기르는 가축이었는지, 아니면 야생의 무리었는지 나와있지 않은 데에다가, 먹을 수도 없는 부정한 음식일 뿐인데 굳이 그것을 사육할 필요가 있었겠는가를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질문이다. 그러나, "돈만 된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냐?"라는 못된 심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유대인들은 Via Maris를 지나다니는 이방인들에게 먹거리 장사를 할 요량으로 돼지를 길렀을 것이 분명하다.

돼지는 단지 부정한 음식만이 아니라, 갈릴리 온 지역을 뒤덮고 있는 낯설고 옳지 않은 것들이다. 꼭 나쁜 것은 빨리 배운다고 이웃 집의 사과가 더 맛있지 않나! 좋은 말로 표현하자면, 외국 문화에 개방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나는 율법에 따라 먹지 않지만, 장사하는 것은 괜찮지 않냐라고 묻는다면 난 들 뭐라고 대답할까. 하지만, 넘지말아야할 선을 넘는 순간, "개방적"인 갈릴리 사람들이 "이방인" 같은 갈릴리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개방형 인간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줏대없는 사람들로 평가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의 대부분을 갈릴리 지역에서 보내신 이유도 "이방인" 같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의 복음을 피토해 내시려고 하였던 것은 아닐까! 

다양한 문화 가운데에는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참 많다. 내게 물어오는 청년들이나 평신도들을 피하고 싶으리 만치 급속도로 빠르게 들어오는 다양한 문화들을, 어떻게 전부 이것은 괜찮고 저것은 좋지 않고를 평가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단호하셨다. 무분별하게 들어 와서는 모든 정신을 다 빼앗아 버리는 그 떼귀신 같은 문화와 가치와 기준들을 전부 호수에 던져버리시고, 오직 그 안에 예수님만 있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삶을 판단하는 기준은 분명하다. 그 사람 안에 예수님만이 중심에 계신가 아니면 복잡한 철학과 말들이 넘쳐나는가?

 



거라사는 오늘날 쿠르시 Kursi 라고 불리는데, 비잔틴 시대 5세기에는 이곳에 115mX130m의 수도원이 있었다. 이 수도원은 614년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 때에 허물어 졌고, 지금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유대인같은 이방인-거라사 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