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프로이드 Sigmund Freud, 칼 막스 Karl Marx, 노암 촘스키 Noam Chomsky, 데이비드 노박 David Novak,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내놓으라는 현대의 사상가들이며 동시에 모두가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상가들은 시대의 흐름을 짚어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며 때로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척자로, 때로는 시대를 떠받치는 수문장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문화와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유대인들의 독특한 문화에 대해서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소위 말하는 유대사상 Judaism에는 일정한 틀이나 공식이 없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흩어지고 다시 뭉치기를 수차례 경험하였고, 흩어진 나라와 지역의 문화에 적응해 나아가면서 지역적으로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 갔기 때문에 고정된 형식이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유목민적인 삶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유대인 사상가를 배출해 내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Beduin

요즈음 한국의 많은 학부모들이 유대인의 교육방법을 따라하려고 한답니다. 그리고 요즈음 이스라엘식 창조경제를 정부차원에서 강조한다고 합니다만, 보여지는 시스템이 유대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가진 다양성에 근거한 실용적인 나그네의 삶과 소수민족으로 디아스포라에서 살아가야하는 생존의 절박함이 유대인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 자녀들을 유대인처럼 키우고 싶다면 어린 나이에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여행을 시켜보는 것은 어떨지, 그리고 정말 기업들이 유대인의 기업처럼 특출나고 싶다면 기업 생존에 대한 간절함을 모든 사원들이 가지도록 해봄은 어떨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 땅과 떨어져 살아가던 디아스포라 Diaspora 의 유대인들이 유대 본토와 관계없이 살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요.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디아스포라는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북부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도시로 일찌기 그리스문명(헬라문명)을 받아들였던 곳입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LXX)이 번역된 곳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철학자 필로 Philo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Philos

기원전 약 20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서 기원후 40년에 사망한 이 유대인 철학자는 유대사상 Judaism을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설명하였던 사상가였습니다. 시대적으로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셨던 시기와 서로 일치하면서 필로에 대해서 연구한 신약학자들도 꽤 있었습니다. 다드 (C.H.Dodd)는 필로가 바울과 요한복음의 저자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기독교 세계에 필로가 더욱 유명해 진 이유는 De specialibus legibus (특별한 법)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말씀이며, 세상은 그 말씀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I,81).

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1:1-3을 읽는 듯하지요. 그래서 필로가 기독교인이었는지에 대해서 연구하던 학자들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필로와 동시대의 인물이면서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졌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세례 요한과 교류하였던 아볼로 Apollos 입니다.

아볼로는 바울과 동시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아볼로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서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은 철저한 헬레니즘 주의자였습니다 (행 18:24). 당대에 알렉산드리아 지역과 헬레니즘 문명이 닿은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지식인 층에서 주로 사용하던 수사학적인 기법은 알레고리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알레고리적인 글쓰기와 글읽기는 그로부터 몇백년이 지나도 계속 되었고, 잘 알다시피 알렉산드리아에 근거를 두고 있는 어거스틴 (St. Augustinus) 또한 알레고리적인 성경해석으로 유명하잖아요.

알레고리 성경해석의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바로 위에서 필로가 말한 "하나님의 형상""말씀"의 대구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당시의 학풍은 플라톤 철학에 근거한 헬레니즘이었는데, 이원법의 그리스 철학과 알레고리의 환상적인 결합은 나중에 알렉산드리아를 신비주의와 영지주의의 중심지로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연구가들은 아볼로가 필로의 영향을 받았거나, 필로의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또 아볼로가 알레고리와 그리스식 수사학, 그리고 문학에 매우 정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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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바울의 고향은 지중해 북동쪽의 다소 Tarsus 였습니다. 다소 역시 헬레니즘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지역이기는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에 상대할 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소는 안디옥을 중심으로한 문화권의 변방 지역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유대 땅의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행 22:3). 그러니까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예루살렘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지역의 교육방법은 알렉산드리아의 교육환경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어요. 알렉산드리아가 알레고리의 상징을 주된 성경해석의 방법론으로 사용하였다면, 예루살렘은 성경이 가지는 문자적인 의미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수사학에 근거해서 미려한 말솜씨와 수려한 문장을 사용하였고, 예루살렘은 그보다는 더 투박한 어체를 구사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는 그리스 로마식 수사학, 수학, 철학과 같은 교실에서의 학습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지만, 예루살렘은 교실에서의 학습보다는 경험을 중시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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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의 교육방법의 차이는 곧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의 차이이기도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네개의 분파나 나뉘어 진 것입니다. 그 네 개의 분파 중에서 규모도 컸고 대립도 심하였던 분파가 아볼로파바울파였던 것같아요 (고전 3:4-7). 투박하지만 몸으로 부딛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예루살렘의 전통을 가진 바울은 그야말로 심는 자의 역할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미 심기워진 복음의 씨앗을 싹 틔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헬레니즘 문명 속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그리고 미려하게 이해시키는 데에는 아볼로만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파의 입장에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격이라고 발끈했을 것이고, 아볼로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헬레니즘적인 수려한 성서적인 지식과 이해에 비해서 거칠어 보이는 바울의 성경해석을 깔보았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지식이 좀 있다고 생색내고 티내는 우리네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롬디도서 주석에서 아볼로의 인격을 볼 수 있는 설명이 나오는데요.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가 분열하는 것을 보고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원치않게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된 것에 대해서 불편해 하면서, 본인이 고린도를 떠나 사람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세워지는 교회가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기로 다짐하고 세나 (딛 3:13)와 함께 그레데 (크레테 섬)으로 물러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이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분열의 문제가 치유됩니다. 바울도 참 좋은 인격의 사람인 것같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거친 농부의 손으로, 그리고 아볼로의 세련된 기독교 변증을 자신이 심은 작물에 물을 주는 사람으로 각각의 달란트가 다름을 알려주고, 그럼에도 그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을 완곡하게 권면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다툼이 바울의 편지로 잠잠하게 되자 그제서야 아볼로는 다시 고린도 교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고린도의 주교가 되지요.

심었다고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바울, 물 주었다고 내가 이렇게 키웠노라고 생색을 내지 않는 아볼로.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비록 아볼로가 신약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잠시 지나가는 인물일지는 모르지만, 바울 못지 않게 그 사람 됨됨이와 신앙의 깊이가 깊고, 두터웠던 소중한 우리 신앙의 선배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