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서신] 쓰레기 더미에 깔린 기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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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2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유홍준 선생님이 우리 미술과 문화재에 눈을 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이렇게 대답을 하셨더군요. "좋은 미술품을 좋은 선생과 함께 감상하며 그 선생의 눈을 빌려 내 눈을 여는 것."이라고.
성지 소개에 관한 글을 쓰기에 앞서 "제 개인적인 견해가 대부분일 이 글들을 어떻게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제 눈을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빌려줄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야생초 편지'가 떠올랐습니다. "야생초 편지"는 황대권이라는 사람이 교도소에서 사랑스레 기르던 야생초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동생에게 편지로 보낸 것을 책으로 낸 것입니다. 편지의 모양을 빌려서 동생에게 보내는 오빠의 글이 어찌나 정감 넘치는지 마치 그 분이 제게 편지를 쓴 것처럼 느꼈답니다.
그래서 이젠 제가 야생초 편지처럼 형에게 이스라엘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려고 합니다. 편지를 통해서 저는 글 쓰는 재미와 더불어 여전히 형으로부터 신앙적인 조언을 듣게 될 테고, "기독교세계" 독자들은 정감 있는(?) 성지 소개의 글을 읽게 될 테니 일석삼조(一石三鳥)가 아닌가 생각하며 시작합니다.
해발 862미터! 형, 우리가 예전에 살았고 내가 태어났던 곳. 또렷하게 생각나지는 않지만 평창의 상진부가 약 해발 700미터정도, 그리고 대관령이 약 800미터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기브아는 해발 862미터에 있습니다.
베냐민 땅의 중심지인 기브아는 젊은 청년 사울이 푸른 꿈을 가지고 온 이스라엘을 호령하였던 곳이었지요. 다윗이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함께 이곳 기브아에서 처가살이를 시작한 곳이기도 해요. 그 기브아에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사울과 다윗, 그리고 요나단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사람들의 집이 있었던(왕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기브아는 그 이름조차 생소해 합니다.
해발 862미터라고 하니, 상당히 높은 고지대를 걸어 올라갔겠거니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사는 동네에서 기브아 정상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고작 20분도 걸리지 않는 곳입니다. 방학 때마다 이스라엘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성서에 나오는 이곳저곳을 참 많이도 보았지만, 정작 제가 사는 동네에 있는 기브아는 오가면서 '아, 저기지!' 하고는 그냥 지나치기를 3년! 물끄러미 계속 저를 내려다보는 기브아에 미안하여 오늘 안식일의 시작에 이춘석 목사님 가정을 기브아행에 동행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형. 기브아에는 사실 볼 것이 없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고고학 사전(Lapp, Nancy L. "Tell El-F´ul." Pages 445a-8b in vol. 2 of The New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 Edited by Stern, Ephraim. 4 vols. Jerusalem: The Israel Exploration Society & Carta, 1993)에는 사울이 세우고, 요시아왕 시대에 다시 그 터 위에 쌓아 올린 성벽의 사진(물론 이것도 전체성벽의 모양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돌담 수준'이기는 하지만)이 덩그러니 걸려있지만, 지금의 기브아는 그냥 동네의 온갖 쓰레기들이 모여 있는 짓다가만 공사장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왜 버려진 공사장이 온갖 범죄의 소굴로 영화에 등장하잖아요, 바로 그 모습입니다.
6일전쟁(1967년) 이전에는 기브아가 요르단의 땅이었어요. 당시 요르단의 왕이었던 후세인 (이라크의 후세인이 아니에요. 그러고 보면, 아랍권에서는 '후세인'이라는 이름 꽤나 흔한 이름인가 봅니다.)이 기브아에 자기의 별장을 지을 요량으로 공사를 시작했는데 떡하니 전쟁이 터져버린 거예요. 전쟁과 함께 중단된 공사장의 폐허들과 자재들은 이미 4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계속 그 자리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3,000년 전의 사울처럼, 요르단의 왕 후세인도 이곳에 살려고 집을 지으려 한 것으로 보아서, 이곳이 터가 좋은 곳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이 폐허와 같은 기브아의 지저분함이 전쟁의 상징물로 보존되고 있는 것인지, 아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에 무관심해서 그냥 방치한 것인지, 그 복잡한 유대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이리저리 헤집어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브아에 올라가면 바람에 비닐봉지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고, 깨진 병조각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고, 냄새나는 쓰레기들과 함께 흉측하게도 짓다가 만, 아니 마치 폭격을 맞은 듯한 건축물이 있는 것이, 도무지 사울의 집이 있었던 곳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드네요. 제가 확신하기는 이곳은 분명히 바로 옆에 있는 아랍마을의 공공 쓰레기장일 겁니다.
함께 간 이춘석 목사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시 건물 아래 그늘에서 쉬시라고 하고는 고고학 사전을 꺼내들어 사진에 나오는 그 성벽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그 성벽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요. 성벽이라고 해봤자, 형이 상상하고 있을 남한산성의 성벽 같은 것이 아니라, 옛 강릉 시동에 있던 우리 외갓집 뒤쪽에 있던 토담 같은 것이니 말입니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단단한 석회암의 돌담이라는 차이점 외에는 정말 울 외갓집 담과 별다름이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담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저 그 담에 손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이미 제 손은 3,000년 전에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성벽의 흔적은 이미 수북한 쓰레기 더미 아래에 깔려 버렸거나, 그냥 그렇게 방치되어 풍우에 날리고 쓸린 흙들이 덮어 버렸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사진 아래에다가 이 사진이 몇 년도 사진인 것 정도는 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멋진 사진 보여주면서 목사님 가정에게 동행을 꼬셨섰는데,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니, 땅 파는 분들에 대해서 무어라 말할 자격은 없으나, 굳이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를 따지기에 앞서, 땅을 파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보존하는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고고학사전의 한쪽 귀퉁이에라도 "이 유적은 이미 쓰레기 더미에 덮여서 찾아볼 수 없으니, 가지 말고 그냥 사진만 보십시오."라고 적어 놓든가….
하지만 기브아의 진면목은 단지 고고학 유물이 남아 있고 없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몇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그 시계(視界)입니다. 기브아는 유대 땅의 예루살렘에서 북쪽의 에브라임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쪽의 와디 켈트를 따라 내려가면, 성경에 나오는 여리고로 가고, 서쪽의 소렉 골짜리를 따라 내려가면, 벳세메스, 소라를 거쳐서 블레셋 평야로 내려갑니다. 바로 남쪽은 예루살렘이고요. 기브아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요르단 계곡, 동남쪽으로는 사해, 남서쪽으로는 소렉 골짜기와 서쪽으로는 기브온의 산당, 북쪽으로는 라마와 미스바와 저 너머의 베델까지, 베냐민의 모든 땅들을 한눈에 볼 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기브아에 올라서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탁 트인 시야가 제 눈앞에서 내달립니다. 올라선 저와 이춘석 목사님가정이 "와~"하고 탄성을 지를 만했어요.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는 하나 골짜기에 처박혀 있는 다윗성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탁 트인 시야를 가진 곳, 흔히 이런 곳을 명당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명당자리 기브아에 살던 젊은 청년 사울은 12지파를 통일할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을 기대하다가 결국 자기 욕심에 빠져버려 길보아에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형, 그것 아세요? 기브아가 세워지고 처음으로 초토화된 것은 사울보다도 훨씬 이전시대인 사사 시대였습니다(삿 19-20).
한 레위 사람이 첩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부터 에브라임 산지로 가는 도중, 해가 져 기브아의 한 집에 머무르게 되었어요. 이때에 기브아 사람들 중에 행실이 옳지 못한 사람들이 이 레위 사람을 겁탈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집 주인이 급히 자기의 집에 들어온 손님(레위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직 처녀인 자기의 딸과, 손님인 레위 사람의 첩을 사람들에게 내어주었지요. 아침이 되어서 이 첩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겁니다. 이에 격분한 레위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첩의 시신을 12토막을 내어서 각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모든 지파들이 이 서릿발 치는 소식과 시신의 토막을 받자 미스바로 모여들었어요. 전 아무리 화가난다해도, 자기의 애첩을 토막 내는 이 레위사람이 더 무섭습니다만, 그들의 역사와 풍습은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이 좋겠지요. 이스라엘 연합군은 기브아가 속해 있었던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내전인 것이지요. 베냐민과의 전쟁에서 베냐민 지파를 완전히 초토화 시킵니다. 내전의 상처가 아물고 재건된 베냐민의 기브아는 다시 외침에 의해 앗시리아에게 또 다시 무너져 버렸습니다(사 10:29).
휜히 트여서 온 베냐민 땅과 유대광야를 내려다 볼 수 있고, 예루살렘과는 놉 땅의 언덕하나 경계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기브아. 이곳의 군사적인 가치는 로마시대에 예루살렘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 출전한 로마 장군 티투스가 진을 바로 기브아에 쳤다는 것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요.
이런 성서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베냐민 지파의 중심지 기브아, 그리고 이스라엘 첫 왕도였던 기브아였지만, 이제는 폐허만 남아 을씨년스러운 이곳에는 이스라엘의 영광과 수치가 온갖 잡다한 쓰레기 밑에 깔려 있습니다. 이 쓰레기들이 혹시 이런 성서와 그 역사에 무관심한 유대인들과 제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지 소개에 관한 글을 쓰기에 앞서 "제 개인적인 견해가 대부분일 이 글들을 어떻게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제 눈을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빌려줄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야생초 편지'가 떠올랐습니다. "야생초 편지"는 황대권이라는 사람이 교도소에서 사랑스레 기르던 야생초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동생에게 편지로 보낸 것을 책으로 낸 것입니다. 편지의 모양을 빌려서 동생에게 보내는 오빠의 글이 어찌나 정감 넘치는지 마치 그 분이 제게 편지를 쓴 것처럼 느꼈답니다.
그래서 이젠 제가 야생초 편지처럼 형에게 이스라엘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려고 합니다. 편지를 통해서 저는 글 쓰는 재미와 더불어 여전히 형으로부터 신앙적인 조언을 듣게 될 테고, "기독교세계" 독자들은 정감 있는(?) 성지 소개의 글을 읽게 될 테니 일석삼조(一石三鳥)가 아닌가 생각하며 시작합니다.
해발 862미터! 형, 우리가 예전에 살았고 내가 태어났던 곳. 또렷하게 생각나지는 않지만 평창의 상진부가 약 해발 700미터정도, 그리고 대관령이 약 800미터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기브아는 해발 862미터에 있습니다.
베냐민 땅의 중심지인 기브아는 젊은 청년 사울이 푸른 꿈을 가지고 온 이스라엘을 호령하였던 곳이었지요. 다윗이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함께 이곳 기브아에서 처가살이를 시작한 곳이기도 해요. 그 기브아에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사울과 다윗, 그리고 요나단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사람들의 집이 있었던(왕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기브아는 그 이름조차 생소해 합니다.
"사무엘이 온 백성에게 알려 준 다음, 그것을 책에 써서 주님 앞에 보관하여 두고, 온 백성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사울이 기브아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때에,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용감한 사람들이 사울을 따라갔다."(삼상 10:25-26)
해발 862미터라고 하니, 상당히 높은 고지대를 걸어 올라갔겠거니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사는 동네에서 기브아 정상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고작 20분도 걸리지 않는 곳입니다. 방학 때마다 이스라엘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성서에 나오는 이곳저곳을 참 많이도 보았지만, 정작 제가 사는 동네에 있는 기브아는 오가면서 '아, 저기지!' 하고는 그냥 지나치기를 3년! 물끄러미 계속 저를 내려다보는 기브아에 미안하여 오늘 안식일의 시작에 이춘석 목사님 가정을 기브아행에 동행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형. 기브아에는 사실 볼 것이 없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고고학 사전(Lapp, Nancy L. "Tell El-F´ul." Pages 445a-8b in vol. 2 of The New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 Edited by Stern, Ephraim. 4 vols. Jerusalem: The Israel Exploration Society & Carta, 1993)에는 사울이 세우고, 요시아왕 시대에 다시 그 터 위에 쌓아 올린 성벽의 사진(물론 이것도 전체성벽의 모양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돌담 수준'이기는 하지만)이 덩그러니 걸려있지만, 지금의 기브아는 그냥 동네의 온갖 쓰레기들이 모여 있는 짓다가만 공사장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왜 버려진 공사장이 온갖 범죄의 소굴로 영화에 등장하잖아요, 바로 그 모습입니다.
6일전쟁(1967년) 이전에는 기브아가 요르단의 땅이었어요. 당시 요르단의 왕이었던 후세인 (이라크의 후세인이 아니에요. 그러고 보면, 아랍권에서는 '후세인'이라는 이름 꽤나 흔한 이름인가 봅니다.)이 기브아에 자기의 별장을 지을 요량으로 공사를 시작했는데 떡하니 전쟁이 터져버린 거예요. 전쟁과 함께 중단된 공사장의 폐허들과 자재들은 이미 4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계속 그 자리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3,000년 전의 사울처럼, 요르단의 왕 후세인도 이곳에 살려고 집을 지으려 한 것으로 보아서, 이곳이 터가 좋은 곳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이 폐허와 같은 기브아의 지저분함이 전쟁의 상징물로 보존되고 있는 것인지, 아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에 무관심해서 그냥 방치한 것인지, 그 복잡한 유대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이리저리 헤집어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브아에 올라가면 바람에 비닐봉지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고, 깨진 병조각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고, 냄새나는 쓰레기들과 함께 흉측하게도 짓다가 만, 아니 마치 폭격을 맞은 듯한 건축물이 있는 것이, 도무지 사울의 집이 있었던 곳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드네요. 제가 확신하기는 이곳은 분명히 바로 옆에 있는 아랍마을의 공공 쓰레기장일 겁니다.
함께 간 이춘석 목사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시 건물 아래 그늘에서 쉬시라고 하고는 고고학 사전을 꺼내들어 사진에 나오는 그 성벽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그 성벽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요. 성벽이라고 해봤자, 형이 상상하고 있을 남한산성의 성벽 같은 것이 아니라, 옛 강릉 시동에 있던 우리 외갓집 뒤쪽에 있던 토담 같은 것이니 말입니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단단한 석회암의 돌담이라는 차이점 외에는 정말 울 외갓집 담과 별다름이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담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저 그 담에 손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이미 제 손은 3,000년 전에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성벽의 흔적은 이미 수북한 쓰레기 더미 아래에 깔려 버렸거나, 그냥 그렇게 방치되어 풍우에 날리고 쓸린 흙들이 덮어 버렸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사진 아래에다가 이 사진이 몇 년도 사진인 것 정도는 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멋진 사진 보여주면서 목사님 가정에게 동행을 꼬셨섰는데,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니, 땅 파는 분들에 대해서 무어라 말할 자격은 없으나, 굳이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를 따지기에 앞서, 땅을 파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보존하는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고고학사전의 한쪽 귀퉁이에라도 "이 유적은 이미 쓰레기 더미에 덮여서 찾아볼 수 없으니, 가지 말고 그냥 사진만 보십시오."라고 적어 놓든가….
하지만 기브아의 진면목은 단지 고고학 유물이 남아 있고 없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몇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그 시계(視界)입니다. 기브아는 유대 땅의 예루살렘에서 북쪽의 에브라임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쪽의 와디 켈트를 따라 내려가면, 성경에 나오는 여리고로 가고, 서쪽의 소렉 골짜리를 따라 내려가면, 벳세메스, 소라를 거쳐서 블레셋 평야로 내려갑니다. 바로 남쪽은 예루살렘이고요. 기브아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요르단 계곡, 동남쪽으로는 사해, 남서쪽으로는 소렉 골짜기와 서쪽으로는 기브온의 산당, 북쪽으로는 라마와 미스바와 저 너머의 베델까지, 베냐민의 모든 땅들을 한눈에 볼 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기브아에 올라서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탁 트인 시야가 제 눈앞에서 내달립니다. 올라선 저와 이춘석 목사님가정이 "와~"하고 탄성을 지를 만했어요.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는 하나 골짜기에 처박혀 있는 다윗성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탁 트인 시야를 가진 곳, 흔히 이런 곳을 명당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명당자리 기브아에 살던 젊은 청년 사울은 12지파를 통일할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을 기대하다가 결국 자기 욕심에 빠져버려 길보아에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형, 그것 아세요? 기브아가 세워지고 처음으로 초토화된 것은 사울보다도 훨씬 이전시대인 사사 시대였습니다(삿 19-20).
한 레위 사람이 첩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부터 에브라임 산지로 가는 도중, 해가 져 기브아의 한 집에 머무르게 되었어요. 이때에 기브아 사람들 중에 행실이 옳지 못한 사람들이 이 레위 사람을 겁탈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집 주인이 급히 자기의 집에 들어온 손님(레위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직 처녀인 자기의 딸과, 손님인 레위 사람의 첩을 사람들에게 내어주었지요. 아침이 되어서 이 첩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겁니다. 이에 격분한 레위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첩의 시신을 12토막을 내어서 각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모든 지파들이 이 서릿발 치는 소식과 시신의 토막을 받자 미스바로 모여들었어요. 전 아무리 화가난다해도, 자기의 애첩을 토막 내는 이 레위사람이 더 무섭습니다만, 그들의 역사와 풍습은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이 좋겠지요. 이스라엘 연합군은 기브아가 속해 있었던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내전인 것이지요. 베냐민과의 전쟁에서 베냐민 지파를 완전히 초토화 시킵니다. 내전의 상처가 아물고 재건된 베냐민의 기브아는 다시 외침에 의해 앗시리아에게 또 다시 무너져 버렸습니다(사 10:29).
휜히 트여서 온 베냐민 땅과 유대광야를 내려다 볼 수 있고, 예루살렘과는 놉 땅의 언덕하나 경계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기브아. 이곳의 군사적인 가치는 로마시대에 예루살렘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 출전한 로마 장군 티투스가 진을 바로 기브아에 쳤다는 것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요.
이런 성서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베냐민 지파의 중심지 기브아, 그리고 이스라엘 첫 왕도였던 기브아였지만, 이제는 폐허만 남아 을씨년스러운 이곳에는 이스라엘의 영광과 수치가 온갖 잡다한 쓰레기 밑에 깔려 있습니다. 이 쓰레기들이 혹시 이런 성서와 그 역사에 무관심한 유대인들과 제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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