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산-사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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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8
도로에 사람의 이름이 붙여지면, 그 사람은 매우 영광스러워 할 겁니다. 이스라엘에는 정치 지도자, 전쟁 영웅, 존경받던 랍비 등 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도시와 지명, 그리고 도로의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어떤 지명에 사람의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 꼭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곳이 비극의 현장이라면 말이지요.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이전까지는 그리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신체 조건으로 보자면야, 준수한 용모에 휜칠한 키 (삼상 9:2) 때문에 베냐민 땅의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봤자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그 지파 가운데에서도 가장 미약한 가정 출신의 남자일 뿐입니다 (삼상 9:21).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조건을 보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고, 사울은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삼상 10:6).
그것도 잠시, 왕이 되고 난 후의 사울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권력에 취하고, 갑자기 쏟아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선 때문이었을까요? 전쟁을 하기 전, 자신을 떠나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붙잡을 마음에 선지자와 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자기가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상 13:8-9). 어차피 하나님의 의중을 물어보는 것은 요식 행위이고 전쟁은 자기가 하는 것이니, 누가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기준으로 전쟁에서 적장을 살리고 좋은 전리품을 챙겨 놓습니다 (삼상 15).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까를 더 걱정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삼상 15:30).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의 나라로 착각한 거지요(삼상 20:31).
한 나라에 주인이 둘 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주인인 나라에서 또 다른 주인인 하나님은 그저 짐이 되는 분일 뿐이지요. 사울은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삼상 13:11-15; 15:14-23).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백성들을 이어주는 제사장들 마저 죽이지요 (삼상 22:19). 결국 사울 곁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들이 살 수 없었겠지요. 그의 주변에는 다윗을 반대하고 자기의 왕권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 사울이 듣기에 달콤한 말만 하는 사람들만 남았을 겁니다. 조금이라도 사울의 귀에 거스른다면, 다윗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을 테니 말이지요. 아들일지라도 말입니다 (삼상 20:30-31).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하는 사람들과 박수들을 쫓아내는 열정이 있는 듯하나 (삼상 28:3), 실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충고에 귀 닫아 버린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치다 길보아 산에서 그 아들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과 더불어 전사합니다 (삼상 31). 죽으면서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삼상 31:4) 고 말한 사울은 아마도 끝까지 세상 사람이 바라볼 자기의 죽음에 대한 이목을 더 걱정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의 시신은 수치 스럽게도 블레셋 사람들의 도시 벳샨(Beth Shean)에 걸렸습니다.
사울이 죽어갔던 길보아 산자락의 한 산을 현재 사울 산 (Mt. Saul) 이라 부릅니다. 사울 산에 올라서면, 요단 강 너머로는 길르앗 야베스가, 그리고 이스르엘 평야의 끝자락에는 예수님 시대에 스키토폴리스 (Scythopolis)라고 불렸던 구약시대의 벳샨(벧스안 또는 벳산)이 보이지요. 온통 뾰족 뾰족한 돌들로 이루어진 사울 산에 올라서니, 바위 틈새에 널부러져 있었을 이스라엘 군인들과 사울,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시체들이 아직도 아우성 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배우라. 하나님의 뾰족한 목소리에 귀 닫고 세상의 평판에 더 귀 기울였던 지도자, 그리고 그를 따르던 백성의 마지막을!”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이전까지는 그리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신체 조건으로 보자면야, 준수한 용모에 휜칠한 키 (삼상 9:2) 때문에 베냐민 땅의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봤자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그 지파 가운데에서도 가장 미약한 가정 출신의 남자일 뿐입니다 (삼상 9:21).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인 조건을 보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고, 사울은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삼상 10:6).
그것도 잠시, 왕이 되고 난 후의 사울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권력에 취하고, 갑자기 쏟아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선 때문이었을까요? 전쟁을 하기 전, 자신을 떠나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붙잡을 마음에 선지자와 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자기가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상 13:8-9). 어차피 하나님의 의중을 물어보는 것은 요식 행위이고 전쟁은 자기가 하는 것이니, 누가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기준으로 전쟁에서 적장을 살리고 좋은 전리품을 챙겨 놓습니다 (삼상 15).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보일까를 더 걱정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삼상 15:30).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의 나라로 착각한 거지요(삼상 20:31).
한 나라에 주인이 둘 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주인인 나라에서 또 다른 주인인 하나님은 그저 짐이 되는 분일 뿐이지요. 사울은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삼상 13:11-15; 15:14-23).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백성들을 이어주는 제사장들 마저 죽이지요 (삼상 22:19). 결국 사울 곁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들이 살 수 없었겠지요. 그의 주변에는 다윗을 반대하고 자기의 왕권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 사울이 듣기에 달콤한 말만 하는 사람들만 남았을 겁니다. 조금이라도 사울의 귀에 거스른다면, 다윗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을 테니 말이지요. 아들일지라도 말입니다 (삼상 20:30-31).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하는 사람들과 박수들을 쫓아내는 열정이 있는 듯하나 (삼상 28:3), 실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충고에 귀 닫아 버린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치다 길보아 산에서 그 아들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과 더불어 전사합니다 (삼상 31). 죽으면서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삼상 31:4) 고 말한 사울은 아마도 끝까지 세상 사람이 바라볼 자기의 죽음에 대한 이목을 더 걱정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의 시신은 수치 스럽게도 블레셋 사람들의 도시 벳샨(Beth Shean)에 걸렸습니다.
사울이 죽어갔던 길보아 산자락의 한 산을 현재 사울 산 (Mt. Saul) 이라 부릅니다. 사울 산에 올라서면, 요단 강 너머로는 길르앗 야베스가, 그리고 이스르엘 평야의 끝자락에는 예수님 시대에 스키토폴리스 (Scythopolis)라고 불렸던 구약시대의 벳샨(벧스안 또는 벳산)이 보이지요. 온통 뾰족 뾰족한 돌들로 이루어진 사울 산에 올라서니, 바위 틈새에 널부러져 있었을 이스라엘 군인들과 사울,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시체들이 아직도 아우성 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배우라. 하나님의 뾰족한 목소리에 귀 닫고 세상의 평판에 더 귀 기울였던 지도자, 그리고 그를 따르던 백성의 마지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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