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바-무두장이 시몬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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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2
레위기에는 매우 자세하게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잘 정리되어 있지요. 그러나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3,200-2,300 여년 전의 시대상황을 반영해 놓았기 때문에 정결과 부정함을 나누어 놓은 레위기의 목록이 예수님 시대의 삶을 모두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대에는 성경에 능통한 제사장, 율법학자, 그리고 랍비들이 첨가하여 만들어낸 “장로들의 전통” (마 15:2; 막 7:3,5) 이 성경의 율법 만큼 사람들의 삶을 틀에 가두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을 마치 “성경대로 사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율법은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름”으로 스스로가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의 백성이라는 것을 일상 속에서 계속 떠올리는 것이지요. 율법을 엄중히 지키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자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그 준수 여부를 고백하고, 그 고백에 따라 회개를 하고, 정결례를 거쳐 부정한 몸을 새롭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누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그 사람이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지 등등을 확인하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의 율법 (이것을 유대인들은 “기록된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이나,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성경보다 더 세밀하게 계속 보완해서 추가해 놓은 유대인들의 전통 (유대인들은 이 “장로들의 전통”을 “구전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의 준수 여부에 대해서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율법을 잘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 지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라며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율법 주의”가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부정하다 손가락질 하거나, 정죄하는 사람이 되는 거지요. 그러고 보면, 신앙 좀 좋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율법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 “악”이 되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았지만, 유대교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가던 베드로는 여전히 그런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철저하게 구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켜가면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야 뭐라고 하겠습니까만은, “유대인들은 정결하고, 이방인들은 정결하지 못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은 그렇지 않다.” “복음에 관해서 유대인들은 그 기쁜 소식을 받을 만하지만, 이방인들은 부정하기에 그 기쁜 소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리 성령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령의 능력을 자기의 사고와 신념에 가두어 버리게 됩니다. 베드로 역시 고넬료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성령 임재의 체험이 곧 그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아닌가 봅니다.
성령을 받은 후, 자타 공인 신앙 좋다 인정받는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려내고는 믿음의 동역자인 시몬의 집에 머무른지 여러날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시몬의 집 윗층 테라스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환상 가운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말하는 이 생물을) 잡아 먹으라.” 세 번이나 주님께서 똑같이 말씀하셨지만, 그 꿈(황홀경)에서 깨어 나서도 여전히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사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그 의미를 알게 되었지요.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 베드로가 역설적으로도 이방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신념과는 상관없이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인 거지요. 그날 베드로가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무두장이 시몬의 집 앞에 서 있자니, 나를 향해야할 신앙의 날카로운 기준이 다른 사람을 향해 있어서 그 칼로 그들을 자르고 베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일하심을 내 믿음과 신앙이 작은 그릇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율법은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름”으로 스스로가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의 백성이라는 것을 일상 속에서 계속 떠올리는 것이지요. 율법을 엄중히 지키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자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그 준수 여부를 고백하고, 그 고백에 따라 회개를 하고, 정결례를 거쳐 부정한 몸을 새롭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누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그 사람이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지 등등을 확인하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의 율법 (이것을 유대인들은 “기록된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이나,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성경보다 더 세밀하게 계속 보완해서 추가해 놓은 유대인들의 전통 (유대인들은 이 “장로들의 전통”을 “구전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의 준수 여부에 대해서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율법을 잘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 지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라며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율법 주의”가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부정하다 손가락질 하거나, 정죄하는 사람이 되는 거지요. 그러고 보면, 신앙 좀 좋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율법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 “악”이 되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았지만, 유대교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가던 베드로는 여전히 그런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철저하게 구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켜가면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야 뭐라고 하겠습니까만은, “유대인들은 정결하고, 이방인들은 정결하지 못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은 그렇지 않다.” “복음에 관해서 유대인들은 그 기쁜 소식을 받을 만하지만, 이방인들은 부정하기에 그 기쁜 소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리 성령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령의 능력을 자기의 사고와 신념에 가두어 버리게 됩니다. 베드로 역시 고넬료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성령 임재의 체험이 곧 그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는 아닌가 봅니다.
성령을 받은 후, 자타 공인 신앙 좋다 인정받는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려내고는 믿음의 동역자인 시몬의 집에 머무른지 여러날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시몬의 집 윗층 테라스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환상 가운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말하는 이 생물을) 잡아 먹으라.” 세 번이나 주님께서 똑같이 말씀하셨지만, 그 꿈(황홀경)에서 깨어 나서도 여전히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사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그 의미를 알게 되었지요.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 베드로가 역설적으로도 이방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신념과는 상관없이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인 거지요. 그날 베드로가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무두장이 시몬의 집 앞에 서 있자니, 나를 향해야할 신앙의 날카로운 기준이 다른 사람을 향해 있어서 그 칼로 그들을 자르고 베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일하심을 내 믿음과 신앙이 작은 그릇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 볼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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