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기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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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3
Amit, Yairah. History and Ideology: An Introduction to Historiography in the Hebrew Bible. The Biblical Seminar 60.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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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세기(?)
성경에 나오는 역사기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하는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연구되었던 주제입니다. 성경에서는 전문 서기관들이 있던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삼하 8:17; 20:25가 될 수 있는데요.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삼하 8:17)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삼하 20:25)
이미 다윗의 시대부터 서기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시대 (기원전 10세기) 부터 역사 기록을 시작하였다는 추론의 근거가 됩니다 (Casuto). 다윗 시대 이후로 솔로몬 시대에도 서기관의 직위는 계속 유지되었고, 제사장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주요 관직을 표기할 때에 등장했습니다 (왕상 4:3).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에는 이미 기원전 10세기부터 이스라엘에서는 역사기록이 시작되었다 (Historiography)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견해의 가장 큰 문제점은 History를 기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왕실에 소속된 서기관이라는 전문 직업을 가진 왕의 최측근일 텐데, 왜 왕의 좋은 것만을 기록하지 않고, 왕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 간통, 살인, 많은 아내들을 둔 것, 하나님의 사람의 조언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것과 같은 이야기들을 기록하였는가의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처럼 사관이라는 직책이 있어서 조선왕조 시대에 왕의 실정까지도 그래도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사건을 기술(Chronicles) 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것은 이미 기원후 16세기를 넘긴 (이스라엘 역사에 비교하면) 최근의 이야기이고요, 고대 서아시아 지방에서는 조선시대의 사관과 같은 역할을 하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아밋은 이런 문제점에 대한 답변을 이렇게 내놓습니다.
왕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의 역사기록을 내어 놓을 수 있었다는 것은 기록자가 왕궁에 속해 있었던 서기관이 아니라, 왕궁 밖에서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고고학적인 증거는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서 왕궁과 독립한 문학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열왕기 역사 기록이나, 성경의 역사 기록의 원재료가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기록들은 기원전 8세기 이후에 기록되었다
그러니까 아밋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기원전 8세기 부터는 왕궁에서 훈련을 받은 서기관들과는 독립적으로 왕궁의 통제를 받지 않는 글쟁이 그룹들 (제 스타일의 표현입니다) 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사회적 현상이 시작된 것일까요? 아밋은 인류사에서 역사 기록이라는 것을 남긴 헤로도투스 Herodotus와 투키디데스 Thucydides, 그리고 요세푸스 Josephus를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이들은 위대한 역사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그들이 속해 있는 국가의 전환점 Turning point가 되는 시점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던 시기였습니다 (722 BCE).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은 단지 북왕국에게만 충격을 주었던 것이 아니라, 남왕국 유다에게도 큰 충격과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었습니다.
❖ 대규모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로 이주해 왔고,
❖ 유다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계관들이 유다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제국에 속한 변방의 지역이 되면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가 무너졌고,
❖ 유다 사람들도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정치, 경제, 문화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국제정세 탓에 유다에 유입되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향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들이 유다에서 일어났는가를 따져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Classical Prophet(또는 Writing Prophet)이라고 불리는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그들의 예언과 설교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왕하 18:4). 이 개혁은 100년 뒤에 요시아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622 BCE).
❖ 잠언과 같은 지혜자들의 말들이 수집되고 복사되었다.
이 시기가 바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이스라엘의 법전과 유다 왕국의 법전이 수집되고 하나의 통일된 형태의 법전으로 재구성되던 시기일 것이라는 것이 신명기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의 주장입니다. 이렇게 통일된 형태로 만들어진 법전이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던 두루마리였다는 것은 현대의 대부분의 신명기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Pre-Deuteronomists (722BCE-622BCE)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던 법전들이 통합되고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던 두루마리), 이 법전을 바탕으로 과거의 역사를 평가한 것을 신명기적 역사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 두개의 법전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과거의 역사를 평가했던 (아직 '학파'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던 시기의) 신명기적인 역사가들은 어떤 신학을 가졌을까요?
❖ Universal Deity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사람들은 YHWH 하나님을 상대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들의 전쟁에서 앗시리아의 신에게 YHWH이 졌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신명기 역사가들은 오직 한 신 YHWH만이 세상의 유일한 신이고, 세상을 다스리시고,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것이다라는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끄신다
이것은 위의 Universal Deity와 연관해서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하나님은 YHWH 한 분이시고, 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상과 벌을 주시는데, 때로는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통해서 벌하신다는 전제 위에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계의 역사를 이끄신다 (HE pilots human history and watches over it)는 신학이 나온 겁니다.
신명기 신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많은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북왕국이 멸망하던 때로부터 요시아의 종교개혁 이전까지 활동하였던 Pre-Deuteronomists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신학은 위의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밋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학은 기원전 8세기에 왕궁에서 활동하던 왕국 서기관들 뿐 아니라, 왕궁 밖에서 왕에게 간언을 하던 서기관들에게도 익히 알려졌고, 이 재야의 인사들 (Classical or Writing Prophet)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역사 기록 (열왕기, 역대기)의 토대가 만들어 졌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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