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성의 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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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1
사람과 동물 모두 “공감”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답니다. 누군가가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고, 누군가가 즐거워하면 함께 그 기쁨을 느끼는 감정 말이지요. 그런데 요즈음은 너무나 개인 중심의 사회가 되고, 누군가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사생활을 침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큰 사건이 벌어진 후의 “동정”은 있을 지언정, “공감”의 좋은 예를 찾아보기는 참 힘든 것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으로부터 대략 16km 떨어진 모레 산 북쪽 자락의 나인성에 가셨습니다. 왜 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사렛과 나인이 가까운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께서 종종 가시던 전도 지역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합니다. 때마침, 한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 해 너머가기 전에 장례를 치르는 유대인들의 전통으로 미루어보건데, 그 아들은 예수님께서 찾아가시던 바로 그날에 죽었을 겁니다. 과부와 고아는 고대 사회에서 대개 보호를 받아야 살 수 있는 약자들에 속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0년 전에 쓰여진 우르-남무(Ur-Nammu) 법전과 3,700년 전에 만들어진 함무라비(Hammurapi) 법전에서는 국가의 법으로 과부와 고아를 보호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우르-남무 법전보다도 대략 400년 먼저 기록된 우르(Ur)의 라가쉬(Lagash)왕의 명령(기원전 약 2,400년)에도 힘을 가진 이들이 고와와 과부를 불공정하게 대할 수 없도록 명시해 놓았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편없는 여인의 형편은 어땠을까요? 자신을 보호해줄 아버지 없는 어린 아이들의 처지는 아마 불보듯 뻔했을 겁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예수님의 시대에 유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이나 질병 때문에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여인들은 가벼운 취급을 당했습니다. 아버지의 권리가 아들에게 온전히 상속되기 이전의 미성년의 아이는 특별한 보호자(고엘)가 필요했지만, 가까운 친족이 모두 고엘의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고엘이랍시고, 보호자를 자청하다가 재산만 가로채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과부와 고아의 유산을 잘 지켜주어야한다는 명령을 도덕률이 아니라 민사/형사 법률로 제정하기까지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은 유대 공동체에서도 가장 하위 계층의 사람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들의 처지는 더 암울했습니다.
그 여인이 어떤 사연으로 과부가 되었는지, 그 아들의 나이는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오로지 의지할 사람은 바로 그 아들 하나였을 겁니다. 그 아들마저 잃어버린 과부의 울음을 예수님은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과 그 여인이 초면인지, 구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애절한 울음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죽은 이가 누워있는 관에 손을 올리셨습니다.
한 사람이 부정하게 된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부정하게 되면 나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물건이 부정하게 되기에, 다시 정결해 지는 순간까지 철저하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전통입니다. 누군가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시신을 만질 경우, 부정해 집니다. 그런데 가족도 아닌 이름 모를 여인의 아들의 관을 만지면서 겪을 수 있는 불편과 부정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관에 손을 올리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도움이 절실했던 그 여인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기원후 4세기에 처음으로 나인에 순례를 온 기록은 있지만 언제 이곳에 처음 교회가 세워졌는지를 알수 없습니다. 다만, 1880년에 프란치스칸 수사들이 무슬림 마을이었던 나인에 과거 교회가 있었던 터를 구입해서 오늘날의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마을에 살던 모든 무슬림들이 교회를 재건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나인에 가서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도 교회 문의 열쇠를 무슬림 가정이 보관하고 있다가 열어주었습니다. 교회와 모스크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도 무척 인상이 깊었습니다. 지금은 공소가 되어서 다볼 산의 신부님이 내려와서 예배를 드리는 주일에만 잠시 문을 여는 나인 성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픔처럼 슬퍼하셨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으로부터 대략 16km 떨어진 모레 산 북쪽 자락의 나인성에 가셨습니다. 왜 가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사렛과 나인이 가까운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께서 종종 가시던 전도 지역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합니다. 때마침, 한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 해 너머가기 전에 장례를 치르는 유대인들의 전통으로 미루어보건데, 그 아들은 예수님께서 찾아가시던 바로 그날에 죽었을 겁니다. 과부와 고아는 고대 사회에서 대개 보호를 받아야 살 수 있는 약자들에 속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0년 전에 쓰여진 우르-남무(Ur-Nammu) 법전과 3,700년 전에 만들어진 함무라비(Hammurapi) 법전에서는 국가의 법으로 과부와 고아를 보호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우르-남무 법전보다도 대략 400년 먼저 기록된 우르(Ur)의 라가쉬(Lagash)왕의 명령(기원전 약 2,400년)에도 힘을 가진 이들이 고와와 과부를 불공정하게 대할 수 없도록 명시해 놓았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편없는 여인의 형편은 어땠을까요? 자신을 보호해줄 아버지 없는 어린 아이들의 처지는 아마 불보듯 뻔했을 겁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예수님의 시대에 유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이나 질병 때문에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여인들은 가벼운 취급을 당했습니다. 아버지의 권리가 아들에게 온전히 상속되기 이전의 미성년의 아이는 특별한 보호자(고엘)가 필요했지만, 가까운 친족이 모두 고엘의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고엘이랍시고, 보호자를 자청하다가 재산만 가로채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과부와 고아의 유산을 잘 지켜주어야한다는 명령을 도덕률이 아니라 민사/형사 법률로 제정하기까지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은 유대 공동체에서도 가장 하위 계층의 사람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들의 처지는 더 암울했습니다.
그 여인이 어떤 사연으로 과부가 되었는지, 그 아들의 나이는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오로지 의지할 사람은 바로 그 아들 하나였을 겁니다. 그 아들마저 잃어버린 과부의 울음을 예수님은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과 그 여인이 초면인지, 구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애절한 울음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죽은 이가 누워있는 관에 손을 올리셨습니다.
한 사람이 부정하게 된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부정하게 되면 나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물건이 부정하게 되기에, 다시 정결해 지는 순간까지 철저하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전통입니다. 누군가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시신을 만질 경우, 부정해 집니다. 그런데 가족도 아닌 이름 모를 여인의 아들의 관을 만지면서 겪을 수 있는 불편과 부정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관에 손을 올리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도움이 절실했던 그 여인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기원후 4세기에 처음으로 나인에 순례를 온 기록은 있지만 언제 이곳에 처음 교회가 세워졌는지를 알수 없습니다. 다만, 1880년에 프란치스칸 수사들이 무슬림 마을이었던 나인에 과거 교회가 있었던 터를 구입해서 오늘날의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마을에 살던 모든 무슬림들이 교회를 재건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나인에 가서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도 교회 문의 열쇠를 무슬림 가정이 보관하고 있다가 열어주었습니다. 교회와 모스크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도 무척 인상이 깊었습니다. 지금은 공소가 되어서 다볼 산의 신부님이 내려와서 예배를 드리는 주일에만 잠시 문을 여는 나인 성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픔처럼 슬퍼하셨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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