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서신] 히스기야의 승부수
holinesscode
2014-07-24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형도 이 찬양 아시지요? 제가 중학교 때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찬양입니다. 이 찬양을 하면서 기타를 치던 교회학교의 선생님들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그 길로 제가 기타를 배우기로 작정하고, 카세트 테이프의 뒷면에기타선 6줄을 그리고, 복음성가 책 뒤에 나와 있던 기타 코드 잡는 법을 따라 하기를 6개월 만에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물론 실력은 형편 없지만요. 아마도 이 찬양은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든 찬양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왜 그런 찬양의 가사가 붙여졌는지도 모르고, 그저 노래가 좋아서 따라 부른 거네요.
히스기야 왕 제 십사 년에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유다 땅에 쳐들어 왔습니다(왕하 18:13). 이때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는 열왕기하 18장과 역대하 32장, 그리고 이사야 36장에 아주 잘 나와 있어요. 형도 아시지요? 랍사게가 유다 말로 사람들이 다 듣도록 외치니, 엘리야김, 셉나, 요아가 랍사게에게 유다 말로 말하지 말고, 시리아 말로 말하라고 부탁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에는 없지만, 역대기에서는 재미있는 정보 하나를 흘려줍니다. 32:3에서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것을 이미 예측 하고서는 성 밖에 있는 물줄기를 메워 버리라고 지시를 하는 거지요.
예루살렘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동서남쪽으로 깎아 지르는 언덕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을 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멀리서 보기에는 별로 인 것 같은 언덕이지만, 막상 그 언덕의 둔치에 서면, 고개를 바짝 쳐들어야 예루살렘 성을 쳐다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도 예루살렘을 점령하려는 다윗에게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눈 먼 사람이나, 다리 저는 사람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삼하 5:6)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지요. 북쪽만 막으면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천혜의 요새도 약점이 있었어요. '물'입니다! 비단 예루살렘 성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성의 가장 큰 약점은 공통적으로 '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의 거주지는 텔(Tel)이라고 불리는 인공언덕입니다. 물도 있고, 교통도 편리하고 농사지을 땅도 있고 방어하기도 수월한 장소에 처음 마을이 세워지고, 그 마을에 사람들이 몇 백 년, 몇 천 년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올라간 인공언덕을 텔이라고 부릅니다. 알기 쉽게 시루떡을 생각하시면 돼요. 한 세대가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전쟁이나, 풍화로 인해서 한 마을이 무너지면, 다시 그 위에다가 마을을 세우기 때문에, 시루떡처럼 층층 계속 해서 마을의 역사가 언덕을 이루며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마을을 세울 때에는 수원지가 마을의 바로 옆에 붙어서 성 안에 있을 수 있었지만, 점점 언덕을 이루며 오르다 보니, 정작 수원지는 성의 바깥에 위치하게 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거지요.
제 아무리 예루살렘이라도 이러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역사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어요. 성의 유일한 수원지는 기혼 샘인데, 기혼 샘이 예루살렘 성의 바깥에 있어서 물을 뜨기 위해서는 성을 나가야 한다는 거지요. 평상시에는 상관없을지 몰라도,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는 전시에는 물을 뜨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이 고안해 낸 방법은 몰래 성 밖으로 빠져나가서 물을 뜨는 비밀 통로입니다.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의 자만을 꺾을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예루살렘의 약점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비밀통로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은근 슬쩍 방심하는 틈을 타서 예루살렘을 정복합니다(삼하 5:8). 그런데 지금은 이스라엘이 산헤립 앞에서 옛 다윗 앞에 섰던 여부스족의 운명이 될 지경이 된 겁니다.
여기에서 히스기야는 승부수를 던집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기혼샘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포위가 되었을 때에 예루살렘의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혼 샘의 성 바깥쪽 입구를 막아버리고, 동시에 기혼 샘에서 물줄기를 파서 물을 성 안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끌어들인 기혼 샘의 물을 저장하는 커다란 물 저장고를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실로암 연못이라고 하면, 흔히들 학교 운동장의 한편에 개구리밥이 떠있고, 개구리가 연잎 위에서 파리를 기다리고, 물속에서는 팔뚝만한 금붕어들이 헤엄쳐 다니는 그런 연못을 상상하고는 하는데, 이러한 연못과는 전혀 관계없이 순수한 물 저장고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실로암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벌였던 그 놀라운 작업이 가히 기가 막힙니다. 기혼 샘에서 실로암까지 파고 들어간 터널의 길이가 약 533미터 정도인데, 이 터널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한 방향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 무리의 사람은 기혼샘에서 실로암으로, 또 한 무리의 사람은 이미 만들어 놓은 실로암에서 기혼샘의 방향으로 양쪽에서 파고 들어간 거지요. 그러고는 이 둘이 정확하게 서로 만났습니다. 2700년 전의 기술로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그런데 이 터널을 완성하고 기념이 되도록 터널의 한쪽 벽에다가 어떻게 이 터널을 팠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실로암 비문"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 터널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비문의 내용이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인용해 볼랍니다.
히브리어와 가나안어로 쓰인 비문을 읽고 분석하는 첫 시간에 이 실로암 비문을 읽고서는 얼마나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는지 모릅니다. 마치 제가 히스기야 터널을 파기 위해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으니까 말이지요. 제가 가만히 있을 사람인가요? 배웠던 그 비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려고 허리춤 아래까지 차는 어두운 물길을 랜턴을 가지고 4번이나 들어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좌우로 벽만 쳐다보면서 샅샅이 뒤지며 걸었습니다. 어! 그런데 이 비문이 보이질 않네요. 결국은 찾질 못했습니다. 제가 좀 더 똑똑했다면, 먼저 고고학 자료를 뒤져보고 갔을 텐데…. 이렇게 머리가 나쁜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책에 보니, 이 비문을 그리스 사람이 떼어가려다가 잡혀서 당시 이스라엘 땅의 주인이었던 터키 사람들이 현재 이스탄불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 두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히스기야의 터널이 더욱더 놀라운 것은 수원지인 기혼샘과 성 안의 물 저장고인 실로암까지의 높이 차가 약 30센티미터 정도 밖에 되질 않아서, 물이 천천히 흐를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죽은 김일성이 놀라 자빠질 지경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땅굴을 잘 판다손 치더라도, 이미 2,700여 년 전에 이런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땅굴을 만들어 내었으니 말입니다.
그날,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한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합니다. 깎아 지르는 절벽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을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오히려 반격을 당하기 십상이지요. 게다가 예루살렘까지는 어떻게 왔지만, 물을 구하지 못하니, 또 금세 전열을 가다듬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산헤립은 먼저 유다 말을 할 줄 아는 랍사게를 보내어서 예루살렘의 민심을 흔들어 놓습니다. 공격하기 힘든 예루살렘 성의 주민들을 동요시켜서, 마음을 흔든 다음, 변절자가 예루살렘의 성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시간, 히스기야는 차고 넘치는 실로암의 샘물을 받아 마시면서, 황급히 군사 행동의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합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산헤립이 예루살렘 성에 발을 딛어보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왕하 19:20-31), 그날 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에게 하신 약속대로 앗시리아군의 진영에서 185,000명을 죽이셨습니다.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의 침공은 히스기야에게 가장 큰 정치적인 위험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위험의 벼랑 끝에서 히스기야는 승부수를 던집니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좀 더 앗시리아 군대와 대치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는 확실한 보험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러고는 대단위의 수로 공사를 시작합니다. 히스기야의 승부수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고, 예루살렘은 북왕국 이스라엘과는 다른 운명의 길을 걷습니다.
히스기야 왕 제 십사 년에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유다 땅에 쳐들어 왔습니다(왕하 18:13). 이때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는 열왕기하 18장과 역대하 32장, 그리고 이사야 36장에 아주 잘 나와 있어요. 형도 아시지요? 랍사게가 유다 말로 사람들이 다 듣도록 외치니, 엘리야김, 셉나, 요아가 랍사게에게 유다 말로 말하지 말고, 시리아 말로 말하라고 부탁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에는 없지만, 역대기에서는 재미있는 정보 하나를 흘려줍니다. 32:3에서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것을 이미 예측 하고서는 성 밖에 있는 물줄기를 메워 버리라고 지시를 하는 거지요.
예루살렘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동서남쪽으로 깎아 지르는 언덕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을 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멀리서 보기에는 별로 인 것 같은 언덕이지만, 막상 그 언덕의 둔치에 서면, 고개를 바짝 쳐들어야 예루살렘 성을 쳐다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도 예루살렘을 점령하려는 다윗에게 "너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 눈 먼 사람이나, 다리 저는 사람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삼하 5:6)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지요. 북쪽만 막으면 되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천혜의 요새도 약점이 있었어요. '물'입니다! 비단 예루살렘 성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성의 가장 큰 약점은 공통적으로 '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의 거주지는 텔(Tel)이라고 불리는 인공언덕입니다. 물도 있고, 교통도 편리하고 농사지을 땅도 있고 방어하기도 수월한 장소에 처음 마을이 세워지고, 그 마을에 사람들이 몇 백 년, 몇 천 년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올라간 인공언덕을 텔이라고 부릅니다. 알기 쉽게 시루떡을 생각하시면 돼요. 한 세대가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전쟁이나, 풍화로 인해서 한 마을이 무너지면, 다시 그 위에다가 마을을 세우기 때문에, 시루떡처럼 층층 계속 해서 마을의 역사가 언덕을 이루며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마을을 세울 때에는 수원지가 마을의 바로 옆에 붙어서 성 안에 있을 수 있었지만, 점점 언덕을 이루며 오르다 보니, 정작 수원지는 성의 바깥에 위치하게 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거지요.
제 아무리 예루살렘이라도 이러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역사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어요. 성의 유일한 수원지는 기혼 샘인데, 기혼 샘이 예루살렘 성의 바깥에 있어서 물을 뜨기 위해서는 성을 나가야 한다는 거지요. 평상시에는 상관없을지 몰라도,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는 전시에는 물을 뜨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이 고안해 낸 방법은 몰래 성 밖으로 빠져나가서 물을 뜨는 비밀 통로입니다. 다윗이 여부스 사람들의 자만을 꺾을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예루살렘의 약점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비밀통로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은근 슬쩍 방심하는 틈을 타서 예루살렘을 정복합니다(삼하 5:8). 그런데 지금은 이스라엘이 산헤립 앞에서 옛 다윗 앞에 섰던 여부스족의 운명이 될 지경이 된 겁니다.
여기에서 히스기야는 승부수를 던집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기혼샘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포위가 되었을 때에 예루살렘의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혼 샘의 성 바깥쪽 입구를 막아버리고, 동시에 기혼 샘에서 물줄기를 파서 물을 성 안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끌어들인 기혼 샘의 물을 저장하는 커다란 물 저장고를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실로암 연못이라고 하면, 흔히들 학교 운동장의 한편에 개구리밥이 떠있고, 개구리가 연잎 위에서 파리를 기다리고, 물속에서는 팔뚝만한 금붕어들이 헤엄쳐 다니는 그런 연못을 상상하고는 하는데, 이러한 연못과는 전혀 관계없이 순수한 물 저장고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실로암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벌였던 그 놀라운 작업이 가히 기가 막힙니다. 기혼 샘에서 실로암까지 파고 들어간 터널의 길이가 약 533미터 정도인데, 이 터널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한 방향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 무리의 사람은 기혼샘에서 실로암으로, 또 한 무리의 사람은 이미 만들어 놓은 실로암에서 기혼샘의 방향으로 양쪽에서 파고 들어간 거지요. 그러고는 이 둘이 정확하게 서로 만났습니다. 2700년 전의 기술로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그런데 이 터널을 완성하고 기념이 되도록 터널의 한쪽 벽에다가 어떻게 이 터널을 팠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실로암 비문"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 터널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비문의 내용이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인용해 볼랍니다.
"…양쪽에서 서로 파 들어갔다. 그리고 3규빗쯤 남았을 때에,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쪽 편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오른쪽 왼쪽으로 점점 크게 들렸다. 벽에 틈을 만들었다. 돌을 쪼는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파들어 갔다. 도끼와 도끼가 서로 부딪쳤다. 그리고 물이 흘러내렸다. 근원지로부터 연못까지 1200규빗을 흘러갔다.…"
히브리어와 가나안어로 쓰인 비문을 읽고 분석하는 첫 시간에 이 실로암 비문을 읽고서는 얼마나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는지 모릅니다. 마치 제가 히스기야 터널을 파기 위해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으니까 말이지요. 제가 가만히 있을 사람인가요? 배웠던 그 비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려고 허리춤 아래까지 차는 어두운 물길을 랜턴을 가지고 4번이나 들어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좌우로 벽만 쳐다보면서 샅샅이 뒤지며 걸었습니다. 어! 그런데 이 비문이 보이질 않네요. 결국은 찾질 못했습니다. 제가 좀 더 똑똑했다면, 먼저 고고학 자료를 뒤져보고 갔을 텐데…. 이렇게 머리가 나쁜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책에 보니, 이 비문을 그리스 사람이 떼어가려다가 잡혀서 당시 이스라엘 땅의 주인이었던 터키 사람들이 현재 이스탄불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 두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히스기야의 터널이 더욱더 놀라운 것은 수원지인 기혼샘과 성 안의 물 저장고인 실로암까지의 높이 차가 약 30센티미터 정도 밖에 되질 않아서, 물이 천천히 흐를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죽은 김일성이 놀라 자빠질 지경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땅굴을 잘 판다손 치더라도, 이미 2,700여 년 전에 이런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땅굴을 만들어 내었으니 말입니다.
그날,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한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합니다. 깎아 지르는 절벽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을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오히려 반격을 당하기 십상이지요. 게다가 예루살렘까지는 어떻게 왔지만, 물을 구하지 못하니, 또 금세 전열을 가다듬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산헤립은 먼저 유다 말을 할 줄 아는 랍사게를 보내어서 예루살렘의 민심을 흔들어 놓습니다. 공격하기 힘든 예루살렘 성의 주민들을 동요시켜서, 마음을 흔든 다음, 변절자가 예루살렘의 성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시간, 히스기야는 차고 넘치는 실로암의 샘물을 받아 마시면서, 황급히 군사 행동의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합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산헤립이 예루살렘 성에 발을 딛어보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왕하 19:20-31), 그날 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에게 하신 약속대로 앗시리아군의 진영에서 185,000명을 죽이셨습니다.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의 침공은 히스기야에게 가장 큰 정치적인 위험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위험의 벼랑 끝에서 히스기야는 승부수를 던집니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좀 더 앗시리아 군대와 대치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는 확실한 보험이 필요했던 거지요. 그러고는 대단위의 수로 공사를 시작합니다. 히스기야의 승부수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고, 예루살렘은 북왕국 이스라엘과는 다른 운명의 길을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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