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서신] 근본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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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6
* 이 글은 기독교세계에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기도할 당시의 글의 타이틀은 "이스라엘 서신"이었습니다. 저의 형에게 편지 형식으로 쓴 글인데요. 그래서 중간 중간 "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런 배경에 대해서 이해하시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은 한참 춥지요? 이스라엘은 눈이 오면, 학교가 문을 닫습니다. 교통수단이 완전히 마비되어서, 예루살렘 시내가 그냥 전부 멈춘다고 보면 되지요. 올해도 하루 눈이 펑펑 왔습니다. 오후 2시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밤 11시가 넘도록 계속 오더라고요. 내심 이렇게 눈이 계속 오면, 내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는데, 아침이 되니 해가 쨍쨍하고 차들이 쌩쌩 달리더군요. 에휴, 학교에 갔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산 중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산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스닐산(아 4:8)이라고도 불리는 헤르몬 산입니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헤르몬 산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지요.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시 133).
지금 헤르몬 산은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지난주에 몇 분 목사님들이 신년 모임을 갈릴리에서 가지고 헤르몬 산에 오르려고 했는데,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입산 통제가 되어 입구에서 다시 돌아내려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 끝에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이렇게 세 나라가 국경삼아 맞대고 있는 산이 해발 2,814미터의 헤르몬 산입니다.
이 헤르몬 산은 지금과 같은 우기에는 눈이 많이 내려서, 이스라엘 유일의 스키장이 있는 곳입니다. 건기에는 워낙 고산지대인지라, 이슬이 많이 내려서 헤르몬 산 주변에서는 물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습니다. 물과 기후가 좋은 곳인지라, 예전부터 이곳에서는 소나 염소들과 같은 가축들을 방목해서 길렀습니다. 시편 22:12, 아모스 4:1에 보면, "바산"이라고 하는 지역과 소들을 연관시켜서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바산이 헤르몬 산 남동쪽 자락의 고원지대인 현재의 골란 고원입니다.
우기에 쌓이는 헤르몬 산의 눈과 건기에 내리는 이슬을 헤르몬 산이 그대로 마시고 나면, 품고 있던 눈 녹은 물과 이슬이 산자락 아래에서 터져 나오는데, 세 개의 샘을 이룹니다. 그 중 두 개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와 "단"에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와 단에 있다는 말보다는, 오히려 그 샘을 중심으로 가이사랴 빌립보와 단이라는 두 도시가 생겼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말이겠네요. 가이사랴 빌립보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지요(마 16:13; 막 8:27). 그 가이사랴 빌립보의 남서쪽, 차로는 약 5분 거리에 또 다른 샘 단이 있는데, 오늘 형에게 말씀드릴 곳이 바로 이곳 단입니다.
기원전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단의 역사를 다 말하라고 한다면, 하루가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린 헤르몬 산에서 터져 나오는 세 개의 샘이 요단 강물의 근원들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샘이 바로 이곳 단에서 터져 나오는 샘이지요. 단에 있는 이 샘물의 양만 일 년에 23억 8천만리터이니, 엄청나지요? 고고학자들이 특별히 이 단에 열광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유명한 돌조각 때문입니다.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 판은 다메섹의 왕 하자엘이라는 사람이 기록한 것인데, 이 비문에 쓰인 "다윗 왕가"라는 말이 성서 외에 '다윗 왕가'를 기록한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학자들에게 성경의 역사가 사실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증거"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기록된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학문적으로 "증거 불충분"이라는 딱지를 모면할 수 없답니다. 그런데 이곳 단을 발굴하면서 "다윗 왕가"라는 말이 새겨진 돌 판이 나왔으니, 이보다 더 멋진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곳 단에는 이 돌 판만큼이나, 중요한 장소가 또 있답니다. 그곳은 여로보암 왕이 이곳에 세워 놓은 제단이에요. 솔로몬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은 남쪽 땅의 유다 왕국과 북쪽 땅의 이스라엘 왕국으로 나라가 나뉩니다. 이렇게 나뉜 이유는 여럿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유다 땅 중심으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절기들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반발이 북쪽 왕국에서 거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초실절이 되면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가야 합니다(출 23:16). 지난 우기 동안에 경작한 밀과 보리들을 거두어들인 후,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가 초실절이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갈 때에는 빈손으로 가질 않고 거두어들인 밀과 보리, 그리고 경작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초실절 절기는 남쪽 땅 유다의 입장에서는 정확하게 맞지만, 날씨가 더 서늘한 북쪽 땅에는 그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쪽 땅에서는 추수를 한다, 초실절을 지킨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기온이 더 낮은 북쪽 땅에서는 아직 추수를 위해서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 거지요. 더군다나, 북쪽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남쪽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초실절 열흘 전에는 집에서 출발을 해야 하지요. 아마 단처럼 이스라엘 땅의 최고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더 일찍 출발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출발을 한들 무엇합니까? 추수한 것이 없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북쪽 지역의 사람들은 추수한 경작물을 대신해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갑니다. 그러고서는 예루살렘에서 남쪽 땅 사람들이 이미 경작하고 추수한 곡물을 사다가 제사를 드리거나, 돈으로 대신 해서 성경에 나와 있는 율법적인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북쪽의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만 좋은 일을 시킨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남쪽 사람들이 추수한 곡물을 북쪽 사람들이 제사를 목적으로 사들이는 격이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남쪽 사람들이 나중에 북쪽에 가서, 북쪽 사람들의 경제적 손실을 보상해줄 무언가를 하였다는 것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북쪽의 돈이 조건 없이 남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일들이, 율법적인 의무에 따라서 일 년에 세 번씩 똑같이 반복되는 겁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또 아닙니다. 율법을 보수적으로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자기가 수고하고 노력한 곡물을 가져오지 않고, 돈을 가지고 온 북쪽 사람들이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북쪽 사람들이라고 자기가 정성껏 경작한 곡물을 추수해서 가져오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북쪽 사람들을 멸시하는 남쪽 사람들의 편견의 눈총에 대한 반감과 일 년 열심히 일한 노력의 대가도 없이 계속 남쪽에 퍼주어야 한다는 피해의식들이 서로 얽혀서 북쪽 사람들과 남쪽 사람들의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고는 솔로몬이 죽은 뒤에, 드디어 그 감정이 폭발하게 된 거지요. 그래서 북쪽 왕국의 여로보암은 북쪽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왕국을 세우고 제일 먼저 시행한 정책사업 중의 하나가 절기를 새롭게 정하는 것이었습니다(왕상 12:32-33). 즉 유다 땅 중심으로 제정한 절기를 이제 북쪽 왕국의 현실에 맞게 다시 고친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도 사마리아 사람들의 유월절은 일반적으로 지키는 유대력의 유월절보다 한 달 더 늦습니다.
사실 절기를 북쪽 왕국의 현실에 맞게 날짜를 새롭게 정한다는 것이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날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북쪽 왕국 사람들은 백성들이 절기 때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고,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금송아지 상을 베델과 바로 이곳 단에 두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왕상 12:26-31). 출 20:4에서 분명히 하나님은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형상화 된 상(像)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어기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300년 전에 광야에서 지었던 선조들의 죄를 여로보암이 그대로 되풀이 했던 거지요. 결국 그 시작이 그리 썩 나쁘지 않았던 여로보암은, 왕국을 가르고 분열시킨 주범 중의 하나로,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여서 십계명을 저버리게 한 신앙의 패륜아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요구가 그러한들, 그리고 시대적인 상황과 조건이 변한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들, 근본적인 것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계명을 저버리고 역사에 악한 왕으로 낙인 찍혀야 했던 여로보암의 역사가 바로 이곳 단에 묻혀 있습니다.
근본은 지켜야하지 않겠습니까?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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