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의 성벽
holinesscode
2017-07-04
신학대학교를 다닐 때, 나중에 목회자가 되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지금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마음껏 제 인생을 즐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되는 선 앞에서는 한번 움찔하기도 했고, 살짝 그 선 넘어로 발을 밀어 보기도 하고, 그 선 앞에서 뒤돌아 서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되고 나서도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게 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그리고 내가 당장에 손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일들 앞에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남들처럼 놀고 싶고, 남들처럼 먹고 싶고, 남들처럼 슬쩍 눈감고 내 신앙의 울타리로부터 잠시 마실갔다오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맞습니다. 비록 제가 목회자이지만, 아직도 덜 영근 풋사과 같은 아직 연약한 사람입니다. 흔들릴 때마다 성경의 말씀으로 나를 다그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그 분의 말씀은 그야말로 “짐”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나님께 외치고 싶습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처한 현실을 좀 보시라고요!”
시드기야 왕 때에 유다의 왕과 제사장, 고위 관료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눈엣가시였습니다. 너무나 힘든 시기를 보내야하는 그들에게 복과 은혜, 그리고 위로의 메세지를 주지는 못할 망정, 예레미야라는 예언자는 늘 “죄”와 “회개”를 외쳐대니 말입니다. “오늘이 여러분의 최고의 날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오늘보다 더 아름다운 내일이 있습니다”를 원하는 유다의 백성들에게 “너희들의 탐욕과 죄가 이 나라를 멸망하게 하리라”는 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치는 예레미야에 대해서 백성들은 시큰둥했습니다.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평가 절하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의 쫓겨난 제사장 집안에서 제사장이라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유다 사람들에게는 합법적이고 귄위가 있는 제사장 바스훌과 스바냐가 있었습니다. 바스훌과 스바냐, 그리고 선지자라고 불리는 하나냐는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평화의 메세지, 외적으로부터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메세지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포장지에 싸고서는 유다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무겁게 여기지 않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데에만 열심이었던 거지요.
제사장들과 예언자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시장과 거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오!”라고 소리치며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할 때마다, “아이구 저 세상 물정 모르고 시류를 모르는 답답한 인간이 또 뭔 소리를 하려나?”했을 겁니다. 유다의 사람들은 그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퇴물 제사장 집안 출신 예언자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그래 또 무슨 짐스럽고 부담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משא יהוה을 가져왔니?”라고 비꼬며 조롱해댔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짐과 부담으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오히려 나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짐”으로, 그리고 “부담”으로 생각하신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요! 예레미야의 시대에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면서, 정신이 확 들었습니다. 선대 히스기야 왕 때에 만들어진 두께 6미터의 육중한 성벽이 무너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무너져 기초만 남아 버린 성벽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짐’으로 여겼던 내 삶의 미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편한 대로 끼워 맞추어 짐을 덜어내고 부담을 없애려고 하였던 과거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리고 선포해야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는 “과연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했던 철없던 전도사 시절이 떠 올랐습니다.
“이 백성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너에게 와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느냐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여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 말하였다고 하여라.” (렘 23:33-40)
그런데 목회자가 되고 나서도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게 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그리고 내가 당장에 손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일들 앞에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남들처럼 놀고 싶고, 남들처럼 먹고 싶고, 남들처럼 슬쩍 눈감고 내 신앙의 울타리로부터 잠시 마실갔다오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맞습니다. 비록 제가 목회자이지만, 아직도 덜 영근 풋사과 같은 아직 연약한 사람입니다. 흔들릴 때마다 성경의 말씀으로 나를 다그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그 분의 말씀은 그야말로 “짐”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나님께 외치고 싶습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처한 현실을 좀 보시라고요!”
시드기야 왕 때에 유다의 왕과 제사장, 고위 관료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눈엣가시였습니다. 너무나 힘든 시기를 보내야하는 그들에게 복과 은혜, 그리고 위로의 메세지를 주지는 못할 망정, 예레미야라는 예언자는 늘 “죄”와 “회개”를 외쳐대니 말입니다. “오늘이 여러분의 최고의 날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오늘보다 더 아름다운 내일이 있습니다”를 원하는 유다의 백성들에게 “너희들의 탐욕과 죄가 이 나라를 멸망하게 하리라”는 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외치는 예레미야에 대해서 백성들은 시큰둥했습니다.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평가 절하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의 쫓겨난 제사장 집안에서 제사장이라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유다 사람들에게는 합법적이고 귄위가 있는 제사장 바스훌과 스바냐가 있었습니다. 바스훌과 스바냐, 그리고 선지자라고 불리는 하나냐는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평화의 메세지, 외적으로부터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메세지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포장지에 싸고서는 유다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무겁게 여기지 않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데에만 열심이었던 거지요.
제사장들과 예언자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시장과 거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오!”라고 소리치며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할 때마다, “아이구 저 세상 물정 모르고 시류를 모르는 답답한 인간이 또 뭔 소리를 하려나?”했을 겁니다. 유다의 사람들은 그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퇴물 제사장 집안 출신 예언자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그래 또 무슨 짐스럽고 부담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משא יהוה을 가져왔니?”라고 비꼬며 조롱해댔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짐과 부담으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오히려 나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짐”으로, 그리고 “부담”으로 생각하신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요! 예레미야의 시대에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면서, 정신이 확 들었습니다. 선대 히스기야 왕 때에 만들어진 두께 6미터의 육중한 성벽이 무너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무너져 기초만 남아 버린 성벽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짐’으로 여겼던 내 삶의 미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편한 대로 끼워 맞추어 짐을 덜어내고 부담을 없애려고 하였던 과거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리고 선포해야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는 “과연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했던 철없던 전도사 시절이 떠 올랐습니다.
“이 백성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너에게 와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느냐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여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 말하였다고 하여라.” (렘 23: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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