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나사로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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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3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유대 땅으로 다시 가자” (요 11:7)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땅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적대적인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잠시 유대 땅을 벗어나 계셨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나사로가 죽었거든요.
나사로는 누이들인 마르다, 마리아와 함께 베다니에 살았습니다. 베다니라는 곳은 두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단 강 건너 동편이고 (요 1:28), 또 다른 한 곳은 감람산 자락에 있지요. 나사로가 살던 곳은 감람산 자락의 베다니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순전한 나드 한 옥합 (300 데나리온)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사건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베다니는 그리 부요한 동네는 아니었을 겁니다. 부요한 사람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성안에서 사는 것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 받는데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의 베다니에 살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부요하지 않은 환경에서 그들보다도 부요한 사람들조차 부담스러운 큰 액수의 옥합을 베다니에 살고 있던 여인이 가져왔다는 것, 그리고 그 옥합을 주님께 온전히 드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자기 헌신이었을 겁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문둥병 환자 시몬의 집에 있을 때에 벌어진 일인데요. 유대교 랍비들의 성경 해석인 미드라쉬에서는 문둥병이 바람에 의해서 전염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 환자 반경 4규빗 이내로 지나가는 것을 금하고 있고, 특히 이스라엘은 지중해 쪽에서 (서쪽)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문둥병 환자의 동쪽으로 지나쳐 걸어가는 조차 피했습니다 (Lev. R. 16:3).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문둥병 환자가 발생하면,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전염되지 않도록 이들을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베다니, 또는 베다니의 주변으로 옮기도록 조처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베다니가 예루살렘에 비해서 그리 정결한 마을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마을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 나사로가 살았던 것.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흘리실 만큼의 지극히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살았던 것은 우연은 아닐겁니다.
“유대 땅으로 다시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도마가 즉각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을 독려했습니다. “그래,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이게 무슨 생뚱 맞은 말이랍니까? 지금 예수님은 “살리려” 가시고자 하시는데, “죽으러” 가자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대화는 곧이어 또 나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나흘 만에 도착한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가 급하게 뛰어 나왔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가 즉각 응답했습니다. “그렇지요.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분명히 다시 살아날 줄 제가 믿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리시겠다는 말이었는데! 그러고보면,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두고 예수님, 도마, 마르다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대화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리는 것”에, 도마는 신념과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죽음”을, 그리고 마르다는 “종말의 신앙”으로 나사로의 죽음을 바라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그 눈들이 보는 세상은 모두가 다릅니다. 만약 세상이 천 개의 눈이 있다면, 그 천 개의 눈이 보는 세상은 같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같은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서도 서로 다른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각자의 다른 의견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앙없는 사람들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피 우시는 예수님을 보며,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며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도마와 마르다는 나름대로의 자기 신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표현이 맞다 틀리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을 보건대, 나의 신앙, 그리고 옳다고 여기는 나의 생각이 주님의 생각, 주님의 의도와 항상 일치하지는 않은가 봅니다. 도마와 마르다의 신앙 고백과는 달리, 오히려 그것을 뛰어 넘어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 그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애통하는 마음으로 눈물 흘리셨을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신 것이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나름대로 신앙이 있다고 하나 예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과는 다른 곳을 향하여 눈 길을 주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을 좀 안다며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아니었을까요?
나사로는 누이들인 마르다, 마리아와 함께 베다니에 살았습니다. 베다니라는 곳은 두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단 강 건너 동편이고 (요 1:28), 또 다른 한 곳은 감람산 자락에 있지요. 나사로가 살던 곳은 감람산 자락의 베다니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순전한 나드 한 옥합 (300 데나리온)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사건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베다니는 그리 부요한 동네는 아니었을 겁니다. 부요한 사람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성안에서 사는 것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 받는데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의 베다니에 살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부요하지 않은 환경에서 그들보다도 부요한 사람들조차 부담스러운 큰 액수의 옥합을 베다니에 살고 있던 여인이 가져왔다는 것, 그리고 그 옥합을 주님께 온전히 드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자기 헌신이었을 겁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문둥병 환자 시몬의 집에 있을 때에 벌어진 일인데요. 유대교 랍비들의 성경 해석인 미드라쉬에서는 문둥병이 바람에 의해서 전염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 환자 반경 4규빗 이내로 지나가는 것을 금하고 있고, 특히 이스라엘은 지중해 쪽에서 (서쪽)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문둥병 환자의 동쪽으로 지나쳐 걸어가는 조차 피했습니다 (Lev. R. 16:3).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문둥병 환자가 발생하면,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전염되지 않도록 이들을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베다니, 또는 베다니의 주변으로 옮기도록 조처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베다니가 예루살렘에 비해서 그리 정결한 마을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마을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 나사로가 살았던 것. 그냥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흘리실 만큼의 지극히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살았던 것은 우연은 아닐겁니다.
“유대 땅으로 다시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도마가 즉각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을 독려했습니다. “그래,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이게 무슨 생뚱 맞은 말이랍니까? 지금 예수님은 “살리려” 가시고자 하시는데, “죽으러” 가자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대화는 곧이어 또 나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나흘 만에 도착한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가 급하게 뛰어 나왔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가 즉각 응답했습니다. “그렇지요.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분명히 다시 살아날 줄 제가 믿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리시겠다는 말이었는데! 그러고보면,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두고 예수님, 도마, 마르다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대화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리는 것”에, 도마는 신념과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죽음”을, 그리고 마르다는 “종말의 신앙”으로 나사로의 죽음을 바라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그 눈들이 보는 세상은 모두가 다릅니다. 만약 세상이 천 개의 눈이 있다면, 그 천 개의 눈이 보는 세상은 같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같은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서도 서로 다른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각자의 다른 의견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앙없는 사람들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피 우시는 예수님을 보며,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며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도마와 마르다는 나름대로의 자기 신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표현이 맞다 틀리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을 보건대, 나의 신앙, 그리고 옳다고 여기는 나의 생각이 주님의 생각, 주님의 의도와 항상 일치하지는 않은가 봅니다. 도마와 마르다의 신앙 고백과는 달리, 오히려 그것을 뛰어 넘어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 그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애통하는 마음으로 눈물 흘리셨을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신 것이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나름대로 신앙이 있다고 하나 예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과는 다른 곳을 향하여 눈 길을 주고 있는 사람들. 예수님을 좀 안다며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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