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루스 암헤르스트 63 (시편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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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8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에 네덜란드 사람 암헤르스트가 파피루스 (Papyrus) 몇개를 골동품 수집용으로 사들였습니다. 민중 이집트어체로 쓰여진 이 파피루스 조각을 어떻게 읽는 줄도 몰랐습니다. 학자들도 이집트 사람들이 사용하던 민중 언어 체계를 당시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때입니다. 그러다가 구입한지 몇 년 뒤, 암헤르스트가 죽고 그 딸이 자기의 몫으로 남겨진 골동품들을 하나 둘 내다 팔던 중, 파피루스 암헤르스트 (Papyrus Amherst) 라고 불리는 이 파피루스도 팔려나갔습니다. 파피루스가 세상에 나온지 거의 100년이 되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이 파피루스가 해독이 되었는데요. 바로 그 파피루스의 내용이 시편 20편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파피루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 다음날로 곧바로 고고학 도서관에 가서 이 파피루스에 대한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도대체 이 시편을 파피루스에 써가며 노래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이 시편을 노래했는지가 너무나 궁금했거든요.
이 시편을 기록하고 노래한 사람들의 삶이 참 기구했습니다. 엘레판틴 섬의 유다 사람들이 이 시편을 파피루스에 기록하기 100여년전 유다가 멸망했습니다. 유다가 패망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과 이집트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국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자하는 방도를 찾아보겠노라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과 권력을 쫓아다녔습니다. 바벨론의 왕에게 유다를 의탁해야한다는 사람들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유다를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자기 말이 맞다며 싸웠습니다.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매수해서 거짓 예언을 하게 했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상대편을 모함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해야한다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은 이상주의자이자 몽상가라고 배척했습니다. 결국, 바벨론에 의해 유다 왕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유다 사람들이 일부는 바벨론으로 그리고 일부는 이집트로 이주했습니다. 더러는 포로로 끌려갔고, 더러는 자유를 찾아 이주했습니다. 이집트로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 이집트 나일강 상류의 작은 섬 엘레판틴이라는 곳에서 살던 작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이 시편을 노래했던 사람들입니다.
엘레판틴 섬에서 나라를 잃고 타향살이를 해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감사할 것이라는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도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작은 성전을 만든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 525BCE). 엘레판틴 섬에서 살았던 유다 사람들의 사정을 살펴보면, 그리 감사할 만한 것이 없었을 것같았습니다. 길이가 2km, 너비가 400m밖에 안되는 그 작은 섬에서 농사를 짓는다손 치더라도 그리 넉넉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나마도 이집트의 강력한 적이었던 누비아 사람들을 대치하고 있는 군사 기지의 역할도 겸했던 섬이었던지라, 늘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했던 곳입니다.
그와 같은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감사의 시편을 노래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시고, 내게 복 주신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건가요? 그런데, 시편 20편에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고난을 맞이하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살궁리를 하느라,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던가, 그 고난을 피할 수 있는 방도를 찾게 마련입니다. 유다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방법을 의지했던 유다 사람들이 얻은 것은 지난한 피난 생활일 뿐이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낯선 땅에 정착하게 된 고난의 때에 유다 사람들은 비로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다윗이 노래하였던 이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고난이 바꿔놓은 유다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집트의 팍팍한 삶과 나라 잃은 민족의 비극 속에서 유다 사람들은 비로서 자기들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걸어왔던 과거와 걷고 있는 현재를 바라보건대, 내가 의지해야할 바로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고백과 노래. 유다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비로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풍요로운 문화와 물질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교인들조차도 풍요는 복이고, 고난은 재앙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 그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삶에 못질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겪었던, 그리고 겪고 있는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서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데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의지할 것 없는 광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고난의 무게에 짓눌려 죽게 놔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은혜와 유익을 주십니다.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이 더 잘보이고, 하나님만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고난이 나라 잃은 유다 백성을 바꾼 것처럼, 주님께서는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여러분을 바꾸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더 깊이 만나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여러분과 저를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만지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을 통해서 저와 함께 여전히 고난의 길을 걷고 계신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이 파피루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 다음날로 곧바로 고고학 도서관에 가서 이 파피루스에 대한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도대체 이 시편을 파피루스에 써가며 노래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이 시편을 노래했는지가 너무나 궁금했거든요.
이 시편을 기록하고 노래한 사람들의 삶이 참 기구했습니다. 엘레판틴 섬의 유다 사람들이 이 시편을 파피루스에 기록하기 100여년전 유다가 멸망했습니다. 유다가 패망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과 이집트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국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자하는 방도를 찾아보겠노라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과 권력을 쫓아다녔습니다. 바벨론의 왕에게 유다를 의탁해야한다는 사람들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유다를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 자기 말이 맞다며 싸웠습니다.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매수해서 거짓 예언을 하게 했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상대편을 모함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해야한다는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은 이상주의자이자 몽상가라고 배척했습니다. 결국, 바벨론에 의해 유다 왕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유다 사람들이 일부는 바벨론으로 그리고 일부는 이집트로 이주했습니다. 더러는 포로로 끌려갔고, 더러는 자유를 찾아 이주했습니다. 이집트로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 이집트 나일강 상류의 작은 섬 엘레판틴이라는 곳에서 살던 작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이 시편을 노래했던 사람들입니다.
엘레판틴 섬에서 나라를 잃고 타향살이를 해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감사할 것이라는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도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작은 성전을 만든 것입니다 (기원전 6세기, 525BCE). 엘레판틴 섬에서 살았던 유다 사람들의 사정을 살펴보면, 그리 감사할 만한 것이 없었을 것같았습니다. 길이가 2km, 너비가 400m밖에 안되는 그 작은 섬에서 농사를 짓는다손 치더라도 그리 넉넉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나마도 이집트의 강력한 적이었던 누비아 사람들을 대치하고 있는 군사 기지의 역할도 겸했던 섬이었던지라, 늘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했던 곳입니다.
그와 같은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감사의 시편을 노래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시고, 내게 복 주신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건가요? 그런데, 시편 20편에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고난을 맞이하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살궁리를 하느라,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던가, 그 고난을 피할 수 있는 방도를 찾게 마련입니다. 유다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방법을 의지했던 유다 사람들이 얻은 것은 지난한 피난 생활일 뿐이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낯선 땅에 정착하게 된 고난의 때에 유다 사람들은 비로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다윗이 노래하였던 이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지만, 우리는 우리 여호와 이름을 자랑한다!
이것은 고난이 바꿔놓은 유다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집트의 팍팍한 삶과 나라 잃은 민족의 비극 속에서 유다 사람들은 비로서 자기들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걸어왔던 과거와 걷고 있는 현재를 바라보건대, 내가 의지해야할 바로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고백과 노래. 유다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비로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풍요로운 문화와 물질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교인들조차도 풍요는 복이고, 고난은 재앙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 그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삶에 못질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겪었던, 그리고 겪고 있는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서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데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의지할 것 없는 광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고난의 무게에 짓눌려 죽게 놔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은혜와 유익을 주십니다.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이 더 잘보이고, 하나님만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고난이 나라 잃은 유다 백성을 바꾼 것처럼, 주님께서는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여러분을 바꾸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더 깊이 만나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여러분과 저를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만지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을 통해서 저와 함께 여전히 고난의 길을 걷고 계신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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